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재 Dec 02. 2021

차별의 경제학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차별들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 특히 노동 시장 내에서, 차별이 존재하는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최근에는 페미니즘의 대두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유리천장’ 등의 구호와 ‘남녀 임금 격차’등의 지표를 통해 이러한 차별을 구체화하고 공론화하려는 시도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업가들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이므로, 누구든 자신에게 가장 큰 이윤을 가져다 줄 사람을 뽑을 뿐 노동 시장에서 여성 차별은 없다는 논리로 이에 맞선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이 글에서는 경제학의 법칙에 입각해서 나타나는 다양한 차별을 살펴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차별’이란 과연 무엇인지 고찰해 볼 예정이다.


  먼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원론적인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경쟁적인 시장에서의 차별은 도태를 불러온다. 

  예를 들어 춘천 출신의 사람만 우대하고 원주 출신의 사람에게는 낮은 임금을 지급하거나 잘 채용하지 않으려는 회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두 도시 출신자들 사이에 유의미한 인적 자본(개인이 지닌 능력, 숙련도, 지식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노동의 질적 수준 - 한국은행) 수준의 차이가 없다고 가정할 때, 춘천 출신의 사람만 고집해서 채용하는 기업은 춘천 출신자에 대한 높아진 인건비를 감수하게 되어 노동자의 출신지를 가리지 않고 채용하는 기업에 밀려 도태된다. 

  이러한 예시는 비단 노동 시장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미국에서 버스나 전차 등의 대중교통 내 흑백 분리가 만연할 당시 많은 전차 회사들은 흑백 분리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들이 흑백 분리 정책에 반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한 정책이 전차의 공석을 늘려 이윤 추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직 이윤에만 집중하는 기업만이 경쟁적인 시장에서 최대의 이윤을 내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차별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몽고메리 주의 버스 내 흑백 분리 정책에 반발하여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로자 파크스(Rosa Parks, 앞) (출처: History.com)

 

  하지만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쟁 체제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차별 행위는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발견된다. 실제로 미국 몽고메리 주의 버스 내 흑백 분리 정책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흑인 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이름은 거의 모든 미국 역사책에 당당히 실려 있을 정도로 과거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차별은 보편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별 행위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시장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차별하는 기업의 도태는 오직 경쟁적 시장에서만 가능하다. 과점 또는 독점 시장에서 기업의 차별 풍조가 만연하다면 개인은 을의 입장에서 이에 저항하기 힘들다. 현실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장이 독점 또는 과점 시장이거나 독점적 경쟁 시장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차별은 개인에게 보다 현실적인 위협이 된다.

  두 번째로 '여왕벌 신드롬'과 같은 피차별자의 자발적 복종이 있다. 여왕벌 신드롬이란 남성 중심적인 직종에서 성공한 여성이 나왔을 때, 그 여성이 대다수의 여성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 다른 여성들과 거리를 두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실력으로 현재의 지위를 쟁취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직 내의 차별을 묵과하거나 조직 내 다른 여성에게 도움을 주지 않음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성 중심적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한다. 이러한 경우 차별을 당하는 주체가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차별 행위가 지속될 수 있다. 이에 완전히 대응되지는 않으나 유명한 사례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여성 참정권 부여 반대가 있다. 그는 스스로 영국의 여왕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의회에서도 많은 동의를 얻은 여성의 참정권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러한 차별의 예시들은 경제학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외부 변수들이 현실에 존재함으로서 나타나는 차별의 예시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경쟁 체제 자체에 내재된 오류가 아니라 현실의 특정한 조건이 만들어낸 불행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순수하게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가는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또 여왕벌 신드롬의 경우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한 2010년대부터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현실 속 차별의 근거로서 부족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의 차별을 경험한 이들은 위에서 언급된 '외부 변수'들이 개입되지 않은 경우에도 차별이 있을 수 있음을 성토한다. 가장 완벽한 경쟁적 자본주의도 차별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기업가가 아무리 '순수한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경영을 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차별이 크게 두 가지 있다. 바로 통계적 차별과 소비자 선호에 의한 차별이다.


  통계적 차별이란 어떤 집단의 특징과 업무에 연관된 지표가 상관 관계를 가질 경우, 그러한 특징을 가진 집단을 채용에서 배제하려는 성향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평균보다 키가 큰 사람의 범죄율은 5%이고, 키가 작은 사람의 범죄율은 1%라고 가정하자. 이 때 일반적인 고용주는 보다 범죄를 적게 저지를 것으로 예상되는 키가 작은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95%의 키가 큰 사람은 범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반인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큰 사람 모두가 단지 통계적으로 상관 관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다. 통계적 차별의 정도는 고용주가 더 합리적이라고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경우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더욱이 통계적 차별은 스스로 차별을 재생산한다. 윗 문단에서 들었던 예시를 다시 떠올려보자.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키가 큰 그룹은 고용주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키가 큰 사람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에 비해 더 낮은 숙련도를 가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지속적으로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생계 유지가 어려워져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다음으로 소비자 선호에 의한 차별이 있다. 소비자 선호에 의한 차별은 소비자가 특정한 형질을 가진 노동자를 선호하여 기업가는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러한 형질이 있는 노동자만을 고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과거 한 신문에서 보았던 예시로, 인도의 소방관과 구조 대상자 간의 일화가 있다. 한 인도 부자의 집에 화재가 발생해서 소방관이 출동했다. 화재로 인해 집이 상당 부분 무너져 집안에 사람이 갇힌 상황이었다. 이에 소방대원들이 집 안으로 집 주인을 구하러 들어갔는데, 집 주인은 화마가 집을 집어삼키는 와중에도 소방대원의 부축을 받아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거부했다. 소방대원의 카스트 계급이 불가촉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방 서비스는 일반적으로 국가가 제공하지만, 신분제가 유효한 A국에서는 사기업이 제공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소방서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 싶다고 가정할 때, 합리적인 선택은 불가촉 천민 출신 소방관을 고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과는 상당히 어긋나지만, 아주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이다.



'학벌주의'의 원조, 미국 아이비 리그(Ivy League)


  이처럼 현실의 차별은 이해할 수 없는 꽉 막힌 구시대적 인식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제학의 논리에 따라 아주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사실 차별에 관한 현실의 문제는 쉽게 차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학벌에 의한 차별이 있다. 어떤 직종은 특정 수준 미만의 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취업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한 직종은 일반적으로 화이트 칼라,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직종 중에는 사실 학벌이 업무 성과와 관련이 적은 경우가 상당수 있다. 그럼에도 고용주들은 명문 학교 출신자들이 '통계적으로 지적 능력이 뛰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혹은 '직무를 더 성실하게 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통계적 차별을 감수하고 명문 학교 출신자들을 고용한다. 또 만일 피고용인이 고객을 접대해야 하는 경우, 고객이 명문 학교 출신자들을 선호한다면 소비자 선호에 의한 차별을 고용에 반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력에 의한 차별은 차별이라기보다 구별이며, 이러한 구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몇몇 조건 하에서는 다른 차별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스튜어디스의 키, 외모 기준 역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고객이 키가 크고 외모가 출중한 스튜어디스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격조건을 명시하는 것은 과연 차별일까, 아닐까? 이론적으로는 소비자 선호에 의한 차별에 해당한다. 항공사가 지원자의 외모에 전혀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모를 평가요소에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합하면, 차별이란 사실 악의에 기인하지 않은 것도 많으며, 차별이라고 불려야 할 지 모호한 것들도 많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럼 차별은 모두 없애야만 하는 대상인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체 합당한 차별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정확히는 없다기 보다, 개개인마다 상이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차별에 대한 경제학의 분석은 힘을 잃는다. 대신 신념과 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무엇이 용인 가능하고 무엇이 용인 가능하지 않은 지는 사실 명제로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은 필자의 이런 결론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맥 빠지는 결론이 사실 이 모든 차별의 본질일지라도, 이 글의 논의가 모두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의 논리에 부합하는 차별이 우리 사회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차별의 구조적 특징을 알고 자신의 신념을 구성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전에 합당한 차별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점점 부당한 차별이 되어가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학벌에 의한 차별을 줄이기 위한 블라인드 채용과 직무적합성검사, 항공사에서 공식적으로 폐기한 키 기준과 그 대신 도입한 팔 리치 측정 등이 그 예시이다. 이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회의 변화이다. 하지만 어떤가. 모든 사실관계를 밝혀 놓고 보니, 이러한 사회의 변화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이제 이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보고,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면 된다. 여기부터는 독자 여러분의 영역이다.

작가의 이전글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유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