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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친 SNS에 들어가 봤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by JLee


자니?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온갖 난리부르스를 쳐가며 부어라 마셔라 냅다 들이부은 다음날 아침, 핸드폰에 남겨진 지난밤의 내 흔적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불킥했던 그런 기억, 다들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한때 많이 받아 봤습니다...


저에게도 전남친이 있었어요.


좋은 사람이었고 꽤 오래 만났으나, 그 사람과의 미래가 더 이상 행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후, 오랜 고민 끝에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상대는 원하지 않았던 이별이었지만, 결국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요?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는 마음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에서 했던 이별이라, 그리움이나 미련 같은 건 아니었고, 단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취업은 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헤어진 마당에 그런 게 왜 궁금했는지...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코 연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글을 하나 마주쳤습니다.


한동안 만났던 사람이 있었으나

지나고 보니 진짜 사랑은 아니었고

채워도 채워도 늘 부족하다 말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힘든 사람이었다


뭐 이런 내용으로요.


이거 누가 봐도 제 얘기잖아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써 놨는지, 이제와 굳이 사랑이 아니었다 말하는 심보는 뭐며, 내가 뭘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았다고 이렇게 공개저격하는 듯한 글을 써 놓은 건지.


처음에는 심장이 떨렸고, 이내 화가 났어요.


오래 만났던 사이라 그 사람 지인들 중에도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건 뭐 실명 거론만 안 했지 대놓고 제 욕 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 더 지나 생각해 보니 저한테 화가 났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낸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어쨌든 이별을 먼저 고한 건 저였으니까요.


안타까웠어요.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기면 좋을 텐데, 저와의 시절을 부정하면 그의 파릇한 20대의 한 자락도 덩달아 변질되는 건데,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라도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혼자 생각하며 그렇게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마무리했었습니다.




그 뒤로 10여 년, 원래 나이가 들면 이렇게 옛 생각이 몽글몽글 나는 건지...


어느 한가로운 오후 집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중학생 때 친구들도 생각나고, 고등학생 때 다니던 독서실도 생각나고, 대학생 때 즐겨 찾던 커피숍도 생각나고, 그러다 보니 첫사랑 OO이고 생각나고, 그때 그 'SNS 구남친'도 생각이 나대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 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저의 푸릇푸릇 예쁘던 시절을 함께 했고, 좋은 추억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잖아요.


같이 영화 보고 커피숍 가서 수다 떠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을 함께 하고, 핸드폰 뜨거워질 때까지 밤새 통화하다가 손목에 주름 잡힌 채로 잠들고, 일이 뜻대도 풀리지 않아 힘든 날에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준 사람이었으니까요.



저는 제 구남친들이 다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든 하고자 했던 일을 멋지게 해내면서, 좋은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며 잘 살고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요.


잘... 지내지?




사진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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