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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공오삼이 Apr 05. 2021

봄을 즐길 줄 아는 스물아홉

in time: 시간 속 장소를 리뷰


부여 ㅣ 프리지아 농원


나는 싱그러운 봄에 태어났다. 구체적으로는 벚나무의 희고 붉은 꽃망울이 팝콘처럼 막 피어 나오기 시작하는 설렘과 동시에 잦은 봄비로 혹여 금세 다 떨어져 버릴까 조바심이 느껴지는 딱 그 언저리가 나의 생일이다. 중앙 도서관 벚나무 아래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막 마친 동기들과 어색한 생일 파티를 보냈던 스무 살을 제외하고, 새 학기와 함께 찾아왔던 수많은 중간고사 시험과 취업 시즌으로 벚꽃을 즐기지 못했다는 매년 반복되는 한탄과 함께 이십 대 대부분의 생일을 보냈다. 봄에 태어났건만 애석하게도 이 계절을 잘 알지도 못했고 나는 28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계절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십 대의 마지막.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올해의 생일은 봄이 주는 생명력과 함께 특별하게 기억된다. 새싹, 나무 그리고 꽃이 만개한 이 계절은 여느 때와 같이 풍성했고, 변한 건 그 풍성함을 내 손끝으로 느껴보기 시작한 나 자신이었다.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화분과 3병의 화병이 올해 나의 봄을 채우고 있다. 나무 혹은 식물과 관련된 지인들의 선물을 받아보며 내 취향이 참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잃어버린 본성을 찾은 것이며, 태생적으로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억지를 부려본다. 이 억지스러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나의 조그만 습관들을 소개한다.



#. 2주에 한 번씩, 꽃 시장 방문

직접 시장을 다니기 전, 꽃시장은 영화에나 나오는 굉장히 거창하고 있어 보이는 장소로써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방문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꽃시장의 분위기는 내 상상과 전혀 달랐다. 꽃을 운반하랴 지나다니는 카트와 섞여 좁은 복도를 비집고 들어가면 꽃이 쏟아질 것 같이 겹겹이 쌓인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게 간 구분이 모호해 눈치껏 가게 사장님을 찾아야 한다. 새롭게 채우는 출렁이는 물통 소리, 가지 치는 가위질 소리, 가격 흥정하는 사람들의 말소리. 여느 시장만큼이나 복잡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시장을 몇 번을 맴돌다 겨우 고른 꽃들은 영자 신문이나 크라프트지가 아닌 부동산 정보 혹은 정치 이슈로 그득한 우리네 신문으로 진한 분홍색의 박스 노끈으로 포장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고정관념을 깨 버린 꽃시장 만의 '투박스러움' 이 나는 참 좋다. 자신의 공간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 함께 복잡한 이 시장을 헤쳐가며 꽃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가 생겼고, 야채 가게 방문하듯 꽃시장을 가는 것이 당연해지자 꽃은 그저 평범한 오이, 당근과 같은 친근한 나의 의식주와 같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잘 고른 꽃에 매일 물을 갈아주고 끝 가지를 예쁘게 관리해주면 대부분 2주 정도 집을 밝혀준다. 2주에 한 번씩 새벽에 다녀오는 꽃시장은 스물아홉 나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 월급 받는 날엔, 슬로우 파마씨

한 달에 하나씩. 월급날 새로운 화분을 집에 들인다. 1년이면 12개. 너무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10개의 화분을 들이면서 새로운 화분을 고를 때면 늘 한 개로는 부족하다는 욕심 섞인 고민에 빠진다. 매 달 식물을 들이다 보니 구매하는 장소에 대해 자연스럽게 많이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슬로우 파마씨라는 공간은 방문자에게 단순히 식물을 '구매'라는 행위에 국한하지 않고 식물과 함께 '치유'를 제안한다.


공덕역 인근에서 버스정류장을 찾던 와중에 노르스름한 전구와 함께 큰 창으로 보이는 식물로 가득한 온실 같은 이 장소를 우연히 지나쳤다. 뒤를 돌아 멈추어 섰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말끔한 옷을 입은 점원이 딱 적당히 필요할 때마다 바라보고 있는 식물에 대해 안내해준다. 단순히 가격, 물 주는 주기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서 원하는 분위기만 전하여도 나에게 꼭 맞는 식물을 제안해준다. 흙의 상태, 식물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설명 듣다 보니 무언가 사러 왔다기보다 식물원에 앉아 나의 공간에 대해 상담을 받는 느낌이었다.


계산 후 이곳을 나설 때도 피식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영수증과 함께 점원이 나에게 쥐어준 것은 다름 아닌 씨앗이 그득하니 담긴 약 봉투. 이 씨앗들은 명함 대신이라고 했다. 이 곳의 감성을 넘어 기획력이라는 이성적인 부분에 까지 감탄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거즈에 물을 묻혀 분무기로 방 안을 오며 가며 물을 주다 보니 어느새 새순이 돋아 놓아둔 그릇의 높이만큼 자랐다. 하루하루 이 작은 새싹이 자라는 것을 보며 다음 달 식물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식물과 약국을 결합해 치유를 제안하는 이 콘셉트.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그를 향해 애정을 표한다. 이 가게를 들어선 순간부터 새순을 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따뜻한 시간을 선사해주어 고맙다.




J 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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