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허락된 딱 그만큼의 거리. 3km
주말이나 야근을 하지 않는 저녁에는 강가 산책로에 운동을 하러 간다.
예전보다는 몸이 조금 좋아진 것 같아 좋아하는 걷기를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욕심내지 않고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가도 욕심내지 않고 나의 페이스대로 열심히 한발 한발. 다시 운동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걸어갔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고...
조금 욕심이 생겼다.
그날. 내가 쓰러진 그날도 벌써 2년 하고도 7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도 역시나 몸을 혹사하며 일을 했지만 약도 꾸준히 잘 챙겨 먹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밤새워 일하지 않으려 애쓰고 잠도 잘 자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기에 조금 욕심을 내었다.
제대로 운동복을 갖춰 입고 조금은 빠른 속도로 다리에 힘을 주고 걸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머리 정수리에 땀샘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 머리끝에서부터 이마 앞 쪽으로 땀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졌다.
아...
2년 하고도 7개월 만이다.
이 느낌...
가뿐 숨과 그 숨에 어울리는 송골송골 땀 송이와 하이라이트를 찍는 듯 '뚝'하고 떨어지는 땀 한 방울.
그때 아주 상쾌한 가을밤 바람이 불며 나무에서 나뭇잎이 사선으로 비처럼 '후드득'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나뭇잎 비가 내리고 가로등이 나뭇잎을 반짝 비추고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살아있는 것만이 볼 수 있는 멋짐이 아닐까!'
순간 울컥했다. 이 모습과 이 순간을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 걸까?
이 느낌을 그동안 얼마나 잊고 살았나.
정말 사랑하면서도 더 이상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나에게 허락된 것들이 아니다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포기를 하였나.
땀은 더 차올라 머리카락을 적셨고 나뭇잎 비와 함께 땀방울도 땅에 툭툭 떨어졌다.
딱 그만큼의 거리 3km.
땀이 나던 그날은 좋은 기분에 좋은 컨디션에 욕심을 내어 3km를 넘어 걸었다.
나에게 허락된, 몇 달 동안 몸을 체크하며 무리가 가지 않는 그 3km를 그만 넘겼다.
기분은 정말 좋았지만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다.
그 예전 그 기분 나쁘던 그 느낌.
몸이 아래로 훅 내려앉을 것만 같은 그 느낌.
그리고 연달아 반응하는 흔들흔들 거리는 내 몸.
힘이 빠지는 다리.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분들이 흠칫 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잘 걸어오던 여자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며 비틀거리는 게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왜였을까?
부끄러워졌다. 내 몸이 부끄러웠다.
왜 부끄러웠을까? 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을까?
그냥 지나가시는 분들에게 아... 조금 어지러워요... 하며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용기조차 없는 나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척을 하며 벤치에 앉아버렸다.
멍하게 올려다본 하늘은 나뭇잎 비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기분 좋은 가을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는데 내 기분은 몇 십분 전과는 다르게 전혀 좋지도 심지어 우울해졌다.
이만큼의 시간, 2년 하고도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다시 돌아갈 수는 있을까?
훅 하고 꺼지는 듯한 느낌을 다시 받으니 그때의 몸상태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빨리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한다.
한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타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걸어갈 수 있다. 다시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나를 믿자. 내 몸을 믿어보자.
'나는 오늘 내 발로 집까지... 무사히... 걸어갈 수 있다.'
라고 작게 말하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렇게 집에 걸어갔다.
생각한 대로 나를 이끌었다.
다음날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운동을 했다.
맨손 줄넘기도 하고 스쿼트와 런지도 했다. 매일 아침 루틴을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나갔다.
2년 하고도 7개월 간 나에게 주어진 거리가 3km
2년 하고도 7개월 간 더 이상의 거리는 무리.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고 매일 근력을 키우고 줄넘기를 하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면
3년 하고도 7개월 그리고 4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나면
나에게 허락된 거리는 4km, 5km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던 그 옛날처럼 6km가 되어있겠지?
멈추지 않기로 했다.
다시 몸이 흔들린 그날은 아주 슬펐고 많이 실망스러웠지만
머리 정수리에서 땀 한 방울이 떨어지던 그 기분.
이거거든! 하며 올려다본 하늘에 나뭇잎 비가 반짝이며 내리던 그 황홀한 모습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살아있음에 그리고 매일 새벽 눈을 뜨고 커피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지금 나에게 허락된 딱 그만큼의 거리가 3km임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작은 다짐을 했다.
내년에 내년 이맘때쯤 내 브런치에
나에게 허락된 딱 그만큼의 거리 4km라고 쓰기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만드는 것처럼 생각대로 나를 계속 이끌어나가기로 했다.
글. 그림 by 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