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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정 Oct 26. 2023

가을엔 고소한 향기가 난다

길거리에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요즘의 나도 그렇고 사람들은 길거리에 은행이 떨어져 있으면 요리조리 피하기 바쁘다. 자칫 은행을 밟았다간 하루종일 신발에서 나는 구릿한 냄새를 풍기면서 다녀야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이나 실내에 들어갔을 때 괜한 오해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아서라도 우리는 마치 길거리가 지뢰밭이라도 된 것처럼 까치발을 하고 큰 걸음으로 은행이 없는 부분을 밟고 지나간다. 


사실 은행은 적정량 섭취했을 때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 가끔은 술안주로 찾는 사람도 있지만, 독한 이미지 때문인지 꺼리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은행이 가을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 중 별미였다. 그래서 은행이 잘 익을때쯤이면 식구대로 다 같이 은행을 주우러 가곤 했다.


냄새도 성질도 독한 은행을 줍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부모님은 내리쬐는 가을 별을 피하기 위해 선캡을 쓰고 목장갑을 낀다. 그리고 그 위에 비닐장갑을 하나 더 덧대어 낀다. 고무줄로 단단히 고정하면 손은 준비 완료. 가장 편하면서도 막 신을 수 있는 작업용 신발을 신고 은행을 담을 바구니나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동네 뒷편으로 가면 큰 도로가 나온다. 코를 찌르는 은행 냄새 때문인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 없이 한적했다. 우리는 도로 옆 인도로 갔다. 엄마 아빠는 은행을 줍기 시작한다. 잘 익어서 떨어진 은행은 두 겹으로 쌓여있다. 그중 가장 겉에 쌓여있는 껍질은 말캉하면서 냄새가 난다. 그런 겉껍질을 벗겨내면 호두만큼이나 딱딱한 속껍질이 나온다. 겉껍질을 분리하고 나면 알이 작다 보니 많이 담은 것 같은데도 줍는데에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역하던 냄새도 서서히 적응된다.


부모님이 은행을 줍는 동안 나는 언니, 동생과 재잘거리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한 번씩 곁눈질로 우리가 잘 있는지 확인하시면서 은행 줍기에 몰두했고, 셋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놀이가 됐던 우리는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꺄르르잘도 웃으며 사람 없는 인도 위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면 은행의 탈바꿈이 시작된다. 깨끗이 세척한 은행의 속껍질을 망치나 뺀지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깬다. 그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진짜 은행의 초록색 속살이 나온다. 그렇게 두 번의 껍질을 까서 만나게 된 은행은 소금과 함께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주셨다. 얇게 둘러싸인 막이 바삭하게 구워지면서 벗겨지고 속은 노랗게 변하면서 노릇하게 익는다. 구릿한 냄새 탓에 모두가 피해 다니던 은행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날 저녁은 은행의 고소한 향으로 가득 찬다.


줍고, 세척하고, 굽고. 들인 정성에 비해 접시에 담겨 나온 은행의 양은 너무나 작았다. 그 이유는 각자 나이만큼의 할당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 이렇게나 고소하고 맛있는 은행을 겨우 6~7알 먹을 수 있던 때에는 너무 아쉬웠고 감칠맛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성 있는 은행의 하루 섭취량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그때는 이쑤시개로 콕콕 집으면서 개수를 세어 먹는 것이 재밌게도 느껴졌다. 


성인이 된 지금, 늘어버린 나이만큼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할당량은 최대 10개다. 그리고 지금은 잘 먹지도 가까이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가을마다 길을 걸으며 폭탄처럼 널린 은행을 볼 때면 생각이 난다. 쫀득하고 고소하던 은행의 맛과 향, 그리고 부모님은 은행 줍기에 열중하고 우리는 뛰어놀던 그날의 풍경, 이쑤시개로 하나, 둘, 먹은 개수를 세어가며 쏙쏙 집어먹던 재미까지. 내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은행이라서 가끔 먹고도 싶지만, 예전의 부모님처럼 은행을 줍고 손질할 엄두가 안 나서 ‘에이 관두자’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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