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KBS아레나 스웨이드 내한공연
어느 평론가 선배의 Theatrical Pop(연극 조의 팝 음악)이란 표현에 이들의 무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유년기 충격파를 안겨준 ‘Fire’의 아서 브라운이나 기묘한 착장의 피터 가브리엘 시기 제네시스같이 가시적 부가물이 아닌, 육성과 기악, 몸짓이 펼치는 한 편 연극이자 스펙터클 행렬이었다. “끼 부리는 데는 비할 바 없다”, “요염 그 자체다.” 같은 지인들의 표현도 다 같은 맥락이었다.
최근 이경준 씨가 번역한 < 칠흑 같은 아침 >을 읽으며 프런트퍼슨 브렛 앤더슨의 예술가적 자의식과 감수성을 느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섬세한 사람이라 낭만과 거리 먼 자본 논리 영국 팝 시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걱정도 했다. 엘라스티카의 저스틴 프리시먼처럼 자신을 지지해 준 조력자와 예술과 창작에 관한 근원적 애정으로 위기를 견뎌낸 브렛은 약 삼십오 년간 스웨이드로만 9장의 음반을 냈고 비교적 공연도 꾸준했다.
그가 공연 전후로, 심지어 공연 도중에 어떤 트라우마와 고통에 신음하는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약속된 100분만큼은 삶의 희로애락을 음악 예술로 승화시켰다. 어쩌면 쏜애플 윤성현이 그랬던 것처럼 브렛 앤더슨에게도 음악과 무대가 셀프테라피일는지 모르겠다.
촬영했던 영상을 집에 와 확인해 보니 연극적 요소가 더욱 도드라졌다.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감정을 토해낸 ‘Life is Golden‘과 손을 좌우로 섬세하게 떨며 디테일을 강조한 ‘So Young’, 내내 관류한 자유로운 춤사위가 모두 그랬다. 곡명을 몸소 체화한 ‘Filmstar’의 “줄마이크 빙빙 돌리기”는 로버트 메이플소프 사진 속 “채찍 든 남자”처럼 퇴폐적이었고 브렛 자체가 무비스타의 현현임을 각인했다. 재작년 이승윤이 올림픽홀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대 좌우를 야생마처럼 뛰어다닌 그는 땅바닥만 바라보는 슈게이저들과 정반대 퍼포먼스를 펼쳤고 일찌감치 땀에 전 셔츠가 검을 주름을 뽐냈지만 개의치 않고 에너지 레벨을 높여갔다.
번쩍이며 쫄깃한 사운드는 또 어떠한가. 20년 선배 믹 론슨과 로니 우드의 글램 록 기타에 이펙트를 잔뜩 먹인 리처드 오크스의 플레잉은 90년대 초 레이브 시기와는 다른 질감의 쾌락주의와 휘황찬란이다. 키다리 아저씨의 여유로운 그루브를 들려준 맷 오스먼과 묵묵히 키보드와 리듬 기타를 곁들인 닐 코들링은 주연 못지 않은 빛나는 조연이었다. 록시 뮤직의 아트 록과 스미스의 징글쟁글, 보위의 글램 로큰롤의 융합은 버나드 버틀러와 오크스의 기타와 브렛의 비음 가창으로 스웨이드만의 온전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완성해냈다.
내밀한 발라드 ‘The 2 Of Us’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선사했다. 두 축 브렛과 버틀러의 긴장과 대치가 극대점에 섰던 < Dog Man Star >는 역설적으로 밴드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을 낚아챘고 아트 록과 글램 록의 중간 지대가 지향성과 정체성에 맞아떨어졌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이 신묘한 수작에 관해 국내에서 많은 담론이 오갔으면 좋겠다.
공연 종료 후 지인들의 SNS에서 꺼지지 않는 흥분감과 감흥을 엿봤다. 예민한 정서와 탐미주의에서 기인한 소리 서사가 저 멀리 한국의 소년 소녀에게도 지독하게, 숨 막히고 처절하도록 아름답게 가닿았음을. 나 자신에게도 이번 내한 콘서트는 중고등학생 시절 브릿팝의 추억으로 갇혔던 스웨이드가 현재진행형의 위대한 Theatrical Pop 밴드로 되살아난 특별한 시간으로 남았다. 언젠가 꼭 재회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