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재즈와 보사노바의 거장 세르지우 멘데스(1941-2024)
바이닐을 본격적으로 모으기 이전인 2019년 가을, 난 뉴욕 퀸즈에 살았다. 맨해튼에 있는 갤러리에서 인턴십을 하던 터였다. 일 마치고 시간이 아까워 맨해튼 거리를 정신없이 쏘다녔다. 여긴 뉴욕 아니겠는가. 도시 곳곳에 퍼져 있던 뉴욕 레코드 스토어 2~3불짜리 염가반 코너엔 주로 꾀죄죄하고 낡은 엘피가 대부분이었지만 더러 건질만한 녀석들이 엘피 초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 보였던 음반이 세르지우 멘지스였다. 정확히 짚고 가자면 세르지우 멘지스와 브라질 66(Sergio Mendes & Brasil ’66)으로 1960년대 멘지스가 대동하고 다니던 백밴드가 브라질 66 다. 능력자로 구성된 지원군은 풍성한 화음과 연주로 멘지스에게 창작의 추진력을 가져다주었다. 멘지스와 브라질 66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팝과 보사노바를 엮은 편안하고 여유로운 작품들을 내놓는다. 애초에 활동 반경이 미국이었기에 미국 냄새가 진한 음악들이었고 영미권 팝, 록밴드의 커버도 잦았다.
세월 흔적이 그대로인 세르지우 멘지스 바이닐들이 까끌까끌한 촉감이 떠오른다. < Equinox >의 초록빛 색감도. 허브 알퍼트의 도움으로 미국 진출의 문을 열었던 < Herb Alpert Presents Sergio Mendes & Brasil ’66 >과 위를 응시하는 군상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 Equinox >(1967), 화사한 원색 양산을 들고 있는 < Look Around > 모두 이때 구겨진 지폐 몇 장으로 구했다. 그러고 보면 2~3불짜리 바이닐과 1불짜리 핏자, 중고책 등 단돈으로 멋진 시간을 보낸 뉴욕이었다.
갤러리가 있는 첼시에서 금요 벼룩시장이 종종 열렸고 여기서 바이닐도 많이 팔았다.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와 잇츠 어 뷰티풀 데이와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1970년대 애시드 록 음반에 눈이 커지곤 했다. 몇 달 간 쌓인 엘피는 결국 퀸즈 외곽의 어느 대형 스토리지(창고)에 보관해야 했다. 뉴욕 떠나기 전 백장 가까운 엘피를 사다리까지 이용해 낑낑대며 넣어두었다. 쿠바와 멕시코 긴 여행 마치고 돌아와 다시 땀 삐질 흘리며 보관했던 LP를 수거다. 빌리 코뱀과 마이클 프랭스, 프로콜 하럼, 빌 넬슨까지 뉴욕 내음이 켜켜히 쌓인 고(古)음반들은 긴 세월을 머금은 채 청파동 어느 주택가에 자리잡았다.
작년 드디어 세르지우 멘지스 영접의 기회가 왔다. 2023년 서울재즈페스티벌 둘째날 토요일 헤드라이너로 선 것이다. 21세기 블루노트의 주역 로버트 글래스퍼와 한국인이 사랑하는 네덜란드 출신 재즈 싱어 바우터 하멜 등 멋진 공연이 이어졌지만 5월 27일 내내 심각할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졌다. 우산과 우비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축제 중간에 떠나지 않는 성격이지만 다음 날 유럽 출국이라 고민이 컸다. 결국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란 맘으로 세르지우 멘지스를 남겨둔 채 올림픽공원을 떠났다.
언젠가 이뤄질 만남을 꿈꾸다 며칠 전 사망 소식을 접했다. 물론 모든 전설적인 아티스트를 만날 순 없지만 세르지우 멘지스는 운명의 장난처럼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서재페 며칠 후 2023년 5월 28일 TBN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진행했던 월드뮤직 코너에서 세르지우 멘지스의 네 곡을 골라 셀프 위로를 건넸다.
비틀스를 리메이크한 ‘The Fool on the Hill’(magical mystery tour 수록)과 마찬가지로 조르제 벤의 삼바 걸작을 재해석한, 이제는 세르지우 멘지스의 곡으로 가장 잘 알려진, 후에 힙합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와 협업했던(아고 숨차!) ‘Mas Que Nada’는 세르지우 입문자들에게 좋을 법한 입문서다.
‘Magalenha’는 세르지우의 후기작이다. 1992년 일렉트라(Elektra)에서 발매된 1992년 작 < Brasileiro > 수록곡이다. “브라질 사람”이란 앨범명처럼 타악기가 강조된 삼바의 하위 분파 바타쿠다(Batucada)를 구사한 이 음반은 한동안 세르지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브라질답지 않은 브라질 음악가” 꼬리표를 어느 정도 불식시켜 주었다.
세르지우 멘지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곡들은 디온 워윅이 먼저 부른 ‘Never Gonna Let You Go’일 것이다. 이처럼 보사노바와 라틴 향취를 영미권 팝과 매끈하게 섞은 이지리스닝이 그의 강점. 하등의 문제가 없지만 좀 더 찐한 브라질 기운을 원하는 이들에겐 좀 밋밋하고 심심했다.
그런 면에서 < Brasileiro >는 마치 “나도 이런 찐 브라질 느낌 내려면 낼 수 있어!”라며 강변하는 듯하다. 당시 오십 대 초반 베테랑의 야심작은 뛰어난 완성도로 1993년 그래미 최우수 월드 뮤직 음반(Best World Music Album) 수상으로 귀결했다. 약 20년 터울의 브라질 후배 뮤지션 카를리뇨스 브라운의 공력이 잘 녹아든 작품이기도 하다.
세르지우의 21세기는 “콜라보와 하이브리드”로 요약된다. 상기한 ‘Mas que nada’의 블랙 아이드 피스 콜라보 버전을 수록한 2006년 < Timeless >는 타 뮤지션들과의 조화, 다양한 장르의 실험으로 제목처럼 “영속적 음악의 힘”을 견지했다 에리카 바두와 스티비 원더, 존 레전드 등 알앤비 거목들이 힘을 보탰고,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윌 아이 엠 같은 팝스타들이 화력을 높였다. 이런 흐름은 2년 후 발표한 < Encanto >에서 이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7GmvaMub0to
많은 이들이 거장의 별세를 추모했다. 프랑스의 디스크자키자 음반 레이블 소유주 질 피터슨(Gilles Peterson)은 “나에게 브라질 음악의 세계를 열어준 인물이다, 캐논볼 애덜리와 함께 한 음반(1962년 작 Cannonball’s Bossa Nova)과 브라질 77(Brasil ’77)가 주조한 1972년 작 < Primal Roots > 같은 끝내주는 음반을 기억한다.” 흥미롭게도 작년부터 알게 된 열혈 음악 애호가 지인도 “재즈와 보사노바, 포크를 아우르는 스모가스보드(온갖 음식이 나오는 뷔페식 식사)” 라고 이 음반을 상찬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얼마 전 즐겨듣는 EBS FM 라디오 프로그램 “세계음악 기행”에서도 세르지우 멘지스 특집으로 그를 회고 및 추모했다. ‘Pretty World’와 ‘Never Gonna Let You Go’ 같은 명곡들이 나른한 오후 시간을 적셨고 스티비 원더가 하모니카로 참여한 ‘Berimbau/Consola o’가 산책을 더욱 즐거이 해주었다.
많은 이들처럼 나에게도 세르지우 멘지스는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마이클 잭슨처럼 언제 들어도 좋은 멘지스는 “이지리스닝”의 전형과도 같지만, 많은 거장 음악가가 그런 것처럼 경력을 펼쳐보면 재즈와 소프트 록, 펑크(Funk)와 디스코 등 다양한 보석이 발견된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듣기 편안하다고 해서 경시할 만한 음악성도 아니다. 그의 공연을 놓친 건 천추의 한으로 남겠지만 역으로 그래서 더 특별하게 남은 멘지스. 벽장 곳곳 흩어져 있는 그의 바이닐을 찬찬히 모아 퍼즐 맞추듯 디스코그래피를 완성할 생각에 벌써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