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주 Jan 30. 2024

화학과 학생, 미술관 큐레이터로.(4)

미술이론과 대학원생으로 일 년을 보낸 소감

3부에서 이어집니다.


이것도 모르고 미술관에서 일하려고 했던 거야? 끔찍하군.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미술이론과 대학원 수업을 1년간 듣고 난 소감을 한 문장으로 적는다면 이 말만큼 적절한 것이 없으리라. 전시리뷰랍시고 적었던 글들이 부끄러워지고 준학예사 자격을 따고 나서 미술 좀 배웠다고 한 마디씩 거들던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지나오니 벌써 1년이 지났다. 화학과에서 공부할 때랑은 다를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입학하고 처음 한 달 동안 느낀 당혹감은 마음의 준비로는 대처가 안될 만큼 컸다. 충격과 회의를 지나 무지의 바닷속을 헤엄친 끝에 이제야 좀 바닷속에서 가끔 바닥에 발을 짚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아주 가끔씩 발 끝에 바닥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기쁨을 느낄 뿐이지 여전히 무지의 바다가 너무 깊지만 말이다. 


1. 들었던 수업들에 대한 소감

1) 선수과목

1년간 들었던 수업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 예술전문사 과정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학과장과 선수과목 면담을 하게 된다. 전문사(석사) 과정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배경 학문이 천차만별인 만큼 학과에서는 선수과목을 통해 학생의 부족한 학문적 배경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학부에 개설된 수업 중 동양미술, 서양미술, 동시대미술 및 비평의 세 영역에서 각 2과목을 들어야 하고 추가로 영역과 무관하게 한 과목을 더 들어야 하기에 총 7과목을 추가로 들어야 한다. 전문사 과정 졸업을 위해 들어야 할 학점이 36학점, 12과목인 것을 생각하면 선수과목을 7개나 들어야 한다는 점은 학생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선수과목 면담이 존재한다. 학부 성적표를 들고 학과장과 면담하여 7과목 중 듣지 않아도 될 과목들을 줄일 수 있다. 학부에서부터 미술사를 전공한 학생들은 선수과목을 듣지 않아도 되며 타전공이더라도 인문계열 혹은 예술을 전공한 경우라면 두세 과목만 들으면 되도록 조정된다. 내 경우에는 화학과에서 들을 기회가 없던 과목들이라 7과목을 다 들을 각오로 입학했었다. 하지만 준학예사 자격을 위해 공부했던 것들을 개론 수업 정도로 인정해 주신 덕분에 두 과목을 제하여 다섯 과목을 듣는 것으로 조정받을 수 있었다.


위의 목록에서 일반선택으로 구분된 과목이 선수과목이다. 전문사 과목 세 개 선수과목 두 개를 들어 첫 1년간은 두 학기 모두 15학점을 이수했다. 학부생 시간표가 아닐까 싶을 만큼 정신없는 시간이었지만 정말 도움이 된 수업이기도 하다. 타전공에서 옮겨온 사람들은 아마 다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을 것이다. 학부 때부터 공부해 온 학생들이 쌓아온 4년이 내게는 없다는 그 부족함이 늘 따라다닌다. 선수과목을 통해 그 결핍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근대사진사, 불교미술의 기초, 20세기 후반 서양미술, 서양 18, 19세기 미술을 선수과목으로 들었다. 1학기 때 근대사진사 수업을 들었는데 사진사의 출발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흐름을 다루기 위해 18세기 유럽의 미술사부터 그 기원을 찾았었다. 동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를 알아야 하고, 20세기를 알기 위해서는 19세기를, 19세기를 알기 위해서는 18세기를... 끝없는 연결고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 연결고리에 쌓여 있는 지식의 공백을 다 채우려면 대학원이 아니라 학부생으로 입학했어야 했기에 현실과 타협하기 위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결론으로 세운 기준이 18세기였다. 18~19세기 서양미술, 20세기 전반, 후반 서양미술만큼은 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준학예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책을 읽으며 미술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개괄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테일에서는 빈칸이 뻥뻥 뚫려있을지라도 말이다. 삶은 길고 배움의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모든 걸 아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지금 가장 필요한 공부를 먼저 하고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채우면 되리라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과목들을 수강하며 느낀 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글의 서두에 적어둔 그 문장이 된다. 이런 기본적인 내용들도 모르고 어떻게 미술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화학과의 커리큘럼으로 비유하자면 일반화학도 모르고 화학을 논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15주 동안 매 수업 세 시간을 꽉꽉 채워가며 수업해 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책 한 권 읽어서는 채울 수 없었을 깊은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미술사 지식이 촘촘해지면 동시대를 바라보는 눈도 같이 밝아진다. 동시대 미술을 논하는 글을 읽을 때 만나게 되는 20세기 작가들의 이름이 반가워지기 시작하면 선수과목을 열심히 들었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2) 전공과목

우리 과의 커리큘럼 중 전공선택은 크게 한국미술, 서양근대, 서양현대, 미술비평의 네 가지 계열로 분류되어 있다. 졸업을 위해 계열별로 최소 한 과목씩 수강해야 한다. 계열별로 전임교수님이 한분씩 계셔서 보통은 한 과목만 듣게 된다면 전임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다. 나는 서양현대미술(이라고 적혔으나 사실 동시대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을 선택했다. 두 학기 동안 서양현대미술 계열 밖의 과목으로 들었던 것은 동양미술사 세미나와 미술사연구방법론(줄여서 미연방)이다. 동양미술사는 한국미술계열이며 미연방은 전공필수과목으로 1학년 1학기에 동기들이 모두 모여 듣는 게 보통이다. 


전공과목의 소감에서는 각 과목에서 배웠던 내용보다는 수업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대학원 수업이니 만큼 강독보다는 세미나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미나 수업은 발제와 토론의 두 축으로 돌아간다. 각 수업의 주제 혹은 텍스트가 미리 제시되면 해당 수업의 발제자가 미리 텍스트를 읽고 발제를 준비해 온다. 발제의 형식은 수업별로 조금씩 다른데, 텍스트를 요약하여 논지를 정리하고 발제자가 생각하는 텍스트에서 토론해 볼 만한 주제 내지는 의견을 덧붙이는 것이 기본 포맷인 것 같다. 어떤 수업에서는 의견의 비율을 더 높게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짧고 명쾌한 정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발제가 끝나면 이후에는 토론이 이어진다. 발제자를 포함하여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모두 수업 전에 텍스트를 엄밀하게 읽어와야 한다. 모두 텍스트를 읽고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토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업에 따라 발제자 이외에 질의자를 정해두는 경우도 있으며 선생님이 제시하는 질문에 맞춰 학생들이 짧은 토론을 열기도 한다. 보통은 이 과정에서 학생들 간의 토론이 끝나면 선생님께서 그 주제에 맞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래서 학기 내내 삶의 패턴이 단순해진다. 발제가 있는 경우에는 텍스트를 읽고 발제문 및 발표자료 작성에 시간을 할애하고 발제가 없는 수업의 경우 텍스트를 읽는 일에 시간을 쏟는다. 체감으로는 매주 한 수업에서 제시하는 텍스트가 100페이지쯤 된다. 논문 세네 편을 읽어가야 하므로 거의 매일 수업을 위한 텍스트를 읽으며 보냈다. 


처음 입학해서 들었던 서양현대미술세미나 수업의 주제가 퍼포먼스 아트였다. 정말 고통스러운 수업이 아닐 수 없었다. 퍼포먼스 아트는 다른 미술과 비교해서도 유난히 모호한 점이 많은 장르 같다. 20세기에 어떤 미술사조들이 있었는지 쭉 배우고 나니 퍼포먼스 아트가 유독 독특한 모호함을 갖고 있다는 걸 이제는 좀 알 것 같지만 그때는 배움의 경험이 부족해서 미술이론 자체가 모호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텍스트를 읽어가야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와닿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해소하지 못한 문제를 하나로 정리하자면 '무엇이 퍼포먼스 아트인가?'였다. 화학과에서는 모든 챕터의 첫 꼭지에 정의와 명명법에 대한 설명이 자리한다. 논의할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범주를 제시하여 소통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논의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무엇이든 논의하기 위해 정의될 수 있는 문제로 변환하는 것이 과학자들이 여태 해온 노력이기도 하기에 나 또한 그런 방식의 배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퍼포먼스 아트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신체가 있으면 퍼포먼스, 근데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던 기록을 제시하는 것도 퍼포먼스아트, 예술가가 최초에 실행했던 퍼포먼스를 재상영하는 것도 퍼포먼스, 기존에 진행되었던 퍼포먼스를 시간이 지나 새로운 인물이 그때의 퍼포먼스를 유사하게 재현하는 것도 퍼포먼스.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이 해소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정의할 수 없어도 논의할 수 있다. 모호함의 상태에서 그 모호함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1년을 배우면서 나름 정리한 결과이다. 연구자마다 각자의 견해에서 퍼포먼스 아트를 정의 내리고 그 정의 위에서 각자의 의견을 세워나간다. 그 글들 사이를 오고 가며 나만의 견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이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인 것 같다. 발제와 토론의 경험에서 얻은 지금까지의 잠정적 답은 이렇다. 그래서 세미나를 수업의 형태로 채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 모여서 하나의 답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기에 서로 열심히 텍스트를 뜯어보고, 각자의 이해를 서로 나누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2. 미술이론과 대학원에 대한 소감

준학예사 자격을 준비할 때 시험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네이버 카페에 들어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카페에서는 준학예사 시험을 위한 강의를 유료로 제공해 줬는데 그 수강생을 모집해야 하기에 준학예사 자격의 장점을 더 부각하는 자료를 올려두었었다. 학부 졸업+준학예사 자격 vs 학부졸업(타 전공)+석사 졸업의 두 선택지 중 전자가 시간도 돈도 아낄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을 얻기 위해 현장에서 2년간 실무경험도 쌓아본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대학원 진학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취직을 위한 지원 자격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석사 학위는 거의 필수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대학원 진학이 필수라고 말하는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배움의 문제 때문이다. 비전공자가 아무리 준학예사 자격을 땄다고 하더라도 학부 4년을 공부한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실력이 떨어진다. 그 상태에서 아무리 현장 경험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배움이 늘 발목을 잡을 것이 뻔하다. 더군다나 이 분야에서 우리 같은 비전공자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미술사 혹은 미술이론을 석사, 박사 과정까지 밟아가며 배워온 사람들이다. 이 길에 정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장에서 단순 행정업무만 처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더 깊은 배움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배움의 기회가 도처에 놓여있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밀도 있는 수업은 여전히 학교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이 생기는 것도 즐겁다. 현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즐겁고 나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같이 나누는 것도 스스로의 앞길을 그려보는 일에 도움이 된다. 특히나 나처럼 과학공부만 하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학교에 다니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이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혼자 책을 읽어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무언가이기에 이끌어줄 선생님과 같이 고민해 줄 동료가 필요하다. 


아직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가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때가 많다. 벼락치기로 읽어가는 바람에 수업에서 겉돌았던 적도 많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걸어온 길도 꽤나 괜찮은 여정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학과 학생, 미술관 큐레이터로.(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