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계조를 본다. 해가 지고 난 뒤의 밤하늘을 본다. 해가 넘어가고도 한참 동안 밤하늘에는 해가 남긴 빛들이 남아있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점점 붉어지면서, 그 붉음이 점차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면서, 마침내 아주 약간의 푸른빛을 머금은 어둠이 되기까지의 밤하늘에는 눈으로만 담을 수 있는 계조의 변화가 흘러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집을 떠나 서울에 온 뒤로 오랜 기간을 떠돌이처럼 지내왔다. 여러 기숙사를 옮겨 다니고 군대에서 생활관을 쓰고 잠깐 일하다가 떠날 줄 알았던 광주에서는 2년이나 월세방 생활을 했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2년을 머물렀다. 2년을 머물렀던 곳들에서 지낼 때에도 2년을 채울 때까지 그곳에서 그렇게 길게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늘 금방 떠나야 하는 신세였고 그것이 내 즐거움이 된 적도 있었지만 떠돌이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난 10년 동안 혼자만의 분리된 공간을 가졌던 적이 거의 없었던 점도 내게는 큰 고통이었다. 반년이면 헤어질 사람들과 함께 좁은 공간을 쓰는 날들이 쭉 이어졌고 언젠가부터는 그들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투명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 그들에게 내가 투명 인간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곳을 나만의 공간처럼 느끼고 싶은 마음이 나를 투명 인간으로 만들었다. 숨을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앓는 동물들이 많다고 하던데 인간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드디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언제 떠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랫동안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금방 떠나야 하던 시절에는 행여나 이삿짐이 늘어 고생할까 봐 대부분의 짐을 본가에 두고 지냈고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아야 했었다. 지금은 본가에 있던 짐의 대부분을 지금 지내는 곳으로 가져왔다.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드디어 생겼다. 계속해서 벗어던지고 싶던 괴로움 하나를 떨쳐내었다. 이제는 이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거라 기대했다.
내 삶은 숨을 곳이 생간만큼 평온함을 얻었으며 숨을 수 있는 공간만큼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내 세상은 베란다 창문 안쪽부터 현관까지 8미터 남짓 되는 간격 사이로 좁아졌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졌다. 침대 앞에 놓인 티비와 책상 위의 모니터 위로 나타나는 모습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세상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왔지만 내가 바라보는 물리적 세계는 네모난 콘크리트 상자 안뿐이었다.
며칠 전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밖에 나가던 날이 있었다. 창문 밖으로 하늘이 보였다. 이미 해는 떨어진지 한참 지나 서쪽 하늘 끝에 붉은빛이 조금 남아있을 뿐인 시간이었다. 어색했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을 나는 방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모습에서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태양이 뜨고 지는 게 내 곁에서 가깝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느꼈었다. 어두운 저녁 하늘의 흐릿한 계조를 보고서야 알았다. 이런 밤하늘을 바라본 적도, 눈에 밤하늘을 담으면서 하늘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적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한참만에 느꼈다.
오늘 지는 해와 내일 뜨는 해는 한 해에 뜨고 지는 365번의 태양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의 눈에 담길 것이다. 이때의 태양이 그 스스로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날의 태양에 특별함을 부여했기에 특별해진 그 태양. 노을의 계조도 그렇다. 모니터에 길들여진 눈과 뇌가 어색함을 느낄 만큼 부드러운 계조가 노을에 특별함을 부여했다.
경이로움을 찾고 싶었다. 단 하나뿐인 경이로움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음 직한 경이로움을 찾고 싶었다. 보편적인 경이로움이 세상에 수백만 가지는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매일 여러 특별함에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소진되지 않을 그런 경이로움 들을 찾고 싶었다. 이 공간에 경이로움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도 흔하면서 특별한 경이로움을 글로 남기는 순간이 평범하게 오래 지속될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올해 나는 이곳에 경이를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삶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자 세웠던 목표들을 잊어버렸다. 매일의 날들을 해치워야 할 것들로 바라보았다. 해치워야 할 것이 되어버린 하루에는 눈을 뜨며 시작되는 아침과 눈을 감으며 끝나는 밤사이에 존재하는 지루함의 찌꺼기 같은 것들만 남아있었다. 그런 시간들이 이어졌다.
지낼 곳을 옮기고 숨을 곳이 생기고 난 뒤에도 삶이 이전처럼 빛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내 안의 빛이 꺼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사람이 된 까닭은 내 눈에 빛을 담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빛을 담고 싶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예전처럼 지는 밤하늘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던 그 눈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
대단한 학자들의 서적들을 뒤적여본들 그들이 주는 빛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뻐꾸기처럼 그 빛만 읊조리고 다녔다. 칸트가 어쩌고저쩌고...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창한 말의 껍질들은 표면이 워낙 단단하고 거칠어서 그 안에 진심을 담기에도, 담긴 진심을 꺼내보기에도 적절하지 않았다. 거친 껍질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거친 껍질 속에 담긴 진심을 꺼내려고 포장과 씨름하느라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정말 보아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것들을 대부분 놓쳐버렸다.
슬픈 일들이 많이 있었다. 슬픔에 질식할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물을때면 '그래도'를 붙여야 하는 시절을 지나 보내고 있다. 일상의 보편적이면서 특별한 빛이 주는 경이로움마저 잃어버리고 나면 깊은 슬픔에 질식하지 않고 깊게 호흡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