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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Mar 03. 2021

08. 비엔나로부터

기꺼이 돌아갑니다.


눈을 뜨자마자 필사적이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빈이라는 생각에 누구보다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 어느 때 보다 대충 씻고 조식을 먹기 위해 승강기를 기다렸다. 호텔에는 승강기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이 곳에 묵은지 반나절 만에 고장이 나서 줄곧 오른쪽 승강기만 이용했었다. 드디어 고쳐진 왼쪽 승강기가 어찌나 반갑던지 굳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왼쪽 승강기를 이용해 조금 늦게 로비로 내려갔다. 2일 내내 맛있던 크루아상, 에그 스크램블, 오렌지 주스는 아쉽게도 3일째 아침에도 맛있었다. 빈 중앙역 앞의 호텔에서 크루아상을 먹기 전까지 내 빵 취향은 소보루였다. 하지만 이 여행 후, 평생 변화가 없던 1위 자리를 크루아상이 탈환했다. 아쉬운 점은 수많은 베이커리가 생겨나는 지금, 어디에서도 19년도 빈의 크루아상을 이길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미치도록 맛있었고 그렇기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아침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본격적인 짐 싸기의 시작이었다.



잡스러운 물건 정리를 마치고 최소한의 짐만 한국으로 들고 가고자 했다. 이 곳에 오기 위한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와 일맥상통하는 마음이었다. 다 가지고 가자, 가서 놓고 오자. 한국을 떠나며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탓에 놓고 올 수 있는 것들은 다 놓고 오자 마음먹었었다. 빈에서의 마지막 아침, 호텔 방에서 나는 미련 없이 놓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그대로 두었다. 남아있는 샴푸, 스킨, 크림. 그리고 약간의 동전. 꾸역꾸역 들고 갔던 동유럽 여행 정보 책. 마지막으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묵었던 호텔 방 테이블에 고이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정말 나는 돌아가야만 할까?


이 곳에 도착할 때 보다 한결 가벼워진 캐리어를 드륵드륵 끌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공항에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캐리어는 호텔에 맡겨둔 채 중앙역에 있는 DM에서 회사 동료, 친구들에게 줄 작은 선물과 DM로고가 프린트된 파우치를 구매했다. 비닐도 싫었고 종이백도 싫었다. 일회용이라는 점이 첫 번째 이유였고 결국 버려질 것이라는 점이 두 번째 이유였다. 빈에서 가져가는 그 무엇도 버려지지 않았으면 했다. 파우치에 작은 선물을 그득 담아 달랑달랑 들고 다시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땐 일행 중 1명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빈에 도착한 지 첫째 날이었나, 둘째 날이었나 문구점에서 구매한 노트와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적었다. '한국으로 가야 할까?'라고.


고민할 것 없이 대답은 '응.'이었지만 고민하고 싶었다. 마치 얽매인 것이 하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자유롭게. 사실 이 곳에 오기 전 나는 인생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한 평생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지루함, 그런 무료함을 알면서도 쉽사리 변화를 주도할 용기는 없는 나에 대한 답답함, 그렇다고 다른 일들로 (예를 들면, 결혼 같은.) 그 지루함을 탈피할 마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고집스러움. 어찌 다 나열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마흔까지만 살고 싶었다. 이 바람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내 삶은 정말 몇 년 남지 않았었고 삶의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생각해왔던 남은 삶의 시간을 이렇게 갑갑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나를 시궁창으로 끌어내리는 듯했다. 용기 내어 유학을 할 수도 무작정 이민을 갈 수도 없었던 내가 택했던 유일한 것, 여행이었다.


그렇게 얻은 열흘 남짓한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약속된 시간의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인 곳에 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가족, 직장, 친구,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모든 것들. 호텔 로비에서 자리를 지키고 시간을 보내고 나면 관성처럼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것이 관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때의 나는 그럴싸한 다짐이 필요했다. 남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 곳에서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이 곳에서만큼 편안할 수 있을까. 이 곳에서만큼 소소하게 즐거울 수 있을까. 모든 답은 알 수 없다 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을 위해 떠올린 며칠간의 시간이 서서히 마음의 장벽을 쌓았다. 이만큼이나 행복했구나. 이만큼이나 편안했구나. 이만큼이나 소소하게 즐거웠구나. 빈이 내게 준 것은 이색적인 도시의 눈요기, 유럽 여행을 왔다는 도취감 뭐 그런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주어져버린 나의 삶을 기꺼이 견딜 수 있게 한 보호막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재되어 있던 긍정의 감정들이 서서히 나의 내면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어쩌면 한국에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약속된 비행기 시간에 발목이 잡혀 돌아가는 것 말고 진심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빼곡히 노트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좋았던 일이 가득한 이 곳, 그래서 떠나기 아쉬운 이 곳, 그렇기에 기필코 돌아와야 하는 이 곳.


다시 돌아오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지.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이 곳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2년이나 지나 침대 위에서 얼음물을 들이키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사고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할 순 없지만 정말 간절히도 다시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그 간절함만큼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렇게 노트와 볼펜을 다시 캐리어에 넣었다. 그리고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다시 빈 중앙역 앞 호텔 로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꺼이 돌아가야지, 그래야 다시 돌아오지. Billy Joel의 노래 가사처럼 빈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


안녕, 안녕, 나의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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