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농사 일지 01.
프리랜서가 되려고 차석 졸업을 한 사람이 있다?
지금은 정시 퇴근 후 취미생활(기타)을 즐기고 있는 아빠지만, 20년 전의 아빠는 꽤 힘든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내가 본 아빠의 모습은 늦게 퇴근해서 자는 모습, 주말에 피곤하다고 자는 모습, 모처럼의 휴일이니 자는 모습... 죄다 자는 모습밖에 없었다. 가끔 아빠에게 오랜 시간 말을 건다면 언제나 '아빠 피곤하다'라는 말과 함께 대화는 종료되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 인지 알기 때문에 이해하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TV 속 드라마나 만화에 등장하는 아빠들은 주말엔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놀이공원에도 데려가 주던데 우리 아빠는 왜 매일 잠만 잘까?' 생각했다. 매번 회사 생활에 지쳐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8살의 나는 절대로 회사원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프리랜서가 돼야겠다는 꿈은 대학 진학 후, 약 1년 동안의 디자인 아르바이트 경험을 하며 시작되었다. 운 좋게 규모가 큰 프로젝트 맡았었기 때문에 학생의 신분일 때 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시급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업무량, 위에서 지시한 대로 만들어야 하는 디자인, 답답한 결재라인 등.... 이럴 바엔 차라리 내가 회사를 차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루에 열 번 정도 했다. 물론 모든 디자인 회사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디자인 회사가 잦은 야근과 보장되지 않는 워라밸 등등의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비슷한 레벨의 고통을 받는다면 차라리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회사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사수를 통해 실무작업에 대한 노하우와 업무 센스 등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일 테다. 프리랜서는 사수가 없으니 모두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셈. 내가 만약 프리랜서가 된다면 더 이상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드물 것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학교에서의 공부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전공 수업은 모두 수강하려 노력했었고, 끈질긴 질문들로 교수님들을 괴롭혔다. 실무와 연계되거나,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경험보다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수업이라면 무조건 수강! 모두가 말렸던 대학원 교류수업도 당연히 수강했었다.
이렇게 4년을 다니니 졸업할 땐 차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꾸준히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둬서, 졸업할 때쯤엔 다들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너 이럴 거면 왜 차석 졸업했어?'라는 반응이었다. (보통은 취업을 위해 학점을 쌓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러려고 차석 졸업한 것이다.
사실 교내 성적과 공모전 실적이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에 졸업하기 전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면접도 몇 차례 다녀왔다. 하지만 죄다 '채용인원 1명'이거나, '채용 연계형 인턴'으로 취업 구명=바늘구멍임을 체감하고 관뒀다. 오히려 이 취업 경험이 나의 프리랜서 꿈에 속도를 더해줬다.
프리랜서로 활동한다는 것이 일반 회사에 들어가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부담도 크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한 것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해보고 싶다.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꿈꿀 수 없는 직업은 어린이 모델뿐이다. 단기적인 목표는, 다양한 공모전에 나가서 포트폴리오를 쌓으며 입지를 넓혀가는 것. 장기적인 목표는 한 달에 200 정도는 버는 프리랜서가 되는 것! 누군가에겐 적은 돈일지 몰라도, 프리랜서를 꿈꾸는 나에게 월 200은 아직 잡을 수 없는 목표로 느껴진다.
재학 중일 땐 교수님이나 친구들과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나누어야 했는데, 졸업한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하다. 친구들하고는 꾸준히 연락하지만 다들 각자의 삶이 바빠 오랜 시간 진지하게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브런치에 글을 기고하며 이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키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영감과 창작욕구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