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농사 일지. 03
편집디자이너의 이스터에그
<북 디자인 101>이라는 책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책이 아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다.'
이 문장은 비단 북 디자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디자인과 미술 전체에 해당하는 말일 테다. 미대 진학을 위해 입시 그림을 그릴 적에 미술 선생님께서 늘 하던 말씀은 '전체적으로 그려라!'였다. 한 부분을 멋들어지게 그리는 것보다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보이지 않아 보이는 부분도, 결국엔 보이게 되어있다는 선생님의 가르침.
그런 의미에서 패키지 디자인을 할 때면, 언제나 성분 표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성분표기를 하나하나 읽어보는 사람은 적고, 자간과 행간의 너비가 적절한지 따져보는 사람들은 더욱 드물다. 하지만 앞면의 디자인만큼 공들여 제작하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져 결국 그 패키지 전체가 '호감 가지 않는 디자인' 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텍스트를 다루는 작업은 시각 디자이너의 기초소양이라고 할 수 있기에, 텍스트를 다루는 실력만 보고도 디자이너의 작업 실력과 기본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텍스트를 다루는 능력이란, 자간과 행간의 너비 조정, 글자의 장평 조정, 문단 정렬, 글의 위계 나눔 등을 포함한다.)
*자간 :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
*행간 : 글의 줄과 줄 사이의 간격
사실 나에겐 성분 표기 부분을 디자인하는 데에 진심이 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성분 표기 부분같이 많은 이들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을 멋지게 디자인해 놓는 것이, 왠지 비밀스러운 이스터에그를 슬쩍 넣어놓는 것과 같은 짜릿함을 주기 때문이다. 알아봐 주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은 없지만, 누군가 알아봐 주었을 때 그 빛을 발하는 이스터에그.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편집 덕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편집 디자이너의 이스터에그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것도 좋아하지만, 찾아내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오프라인으로 물건을 살 때면 괜히 패키지를 뒤로 돌려 슬쩍 확인해 보곤 한다. 다른 디자이너 분께서 열심히 제작해 둔 멋진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잘 쓰인 시 한 편을,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 한 점을 보는듯한 기분이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디테일을 위해 힘쓰는 디자이너들, 모두 파이팅!
그 노력은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것이며, 누군가는 반드시 발견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