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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Apr 27. 2021

바이주 白酒

내가 사랑한 것들 14

14. 바이주 白酒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바이주에 관한 한 나는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      


바이주를 알기 전까지는 나는 술의 참맛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술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3 봄 소풍 날 저녁, 친구들과 처음 마신 술자리에서 소주 다섯 병(그때는무려 25도였다.)을 마시고 멀쩡하게 하숙집으로 돌아올 정도였으니 술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술맛을 즐기는 애주가는 딱히 아니었다. 소주는 맛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술이었고 지금의 좋은 맥주들이 나오기 전 우리나라의 맥주는 과히 맛을 평가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유학 시절 영국의 펍에서 처음으로 맥주가 맛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빠져들 만큼은 아니었다. 와인도 제법 마셔보았지만 와인 애호가가 되지는 못했다. 장이 민감한 편이라 술 먹고 난 뒷날의 거북함도 술을 애정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여행 다닐 때도 장 트러블 때문에 술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순전히 술맛만을 찾아서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좋은 일이나 축하할 일 있을 때 술은 거들어 주는 조력자였지 주인공은 아니었다.      


술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뀐 건 중국 촬영을 위해 로케이션 헌팅을 간 직후였다. 공룡이 살 만한 원시적인 배경을 찾아다녔으니 우리가 간 곳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오지들이었다. 대부분 저녁이 되면 갈 곳도 볼 것도 딱히 없는 곳들이었다. 도착한 첫날 계림의 한적한 시골 마을 빙관에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로케이션 매니저가 지역술이라고 바이주 한 병을 주문해주었다. 중국 특유의 조악한 용기에 담긴 그 술은 대학 때 어쩌다 먹었던 이과주 생각이 나게 했다. 독하기만 한 싸구려 술. 예의상 별 기대 없이 마셨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입안에 그윽한 향기가 퍼지면서 기분 좋은 달콤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이건 뭐지? 이럴 수가 있나? 이런 시골의 이름없는 술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맛을 즐기며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한 병이 뚝딱하고 사라졌다. 불쾌하지 않은 취기, 기분 좋은 나른함이 지친 몸을 녹여주었다. 머리도 아프지 않았고, 다음날 숙취도 없었다. 그날 바이주에 대한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 마치 궁벽한 시골 냇가에서 빨래하던 처녀 양귀비를 만나 사랑에 빠진 당 현종처럼 나도 바이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백주白酒를 중국어로 바이주(정확하게는 바이지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고량주로 불렸고 산동성 사투리가 들어와 빼갈이라고도 했다. 주로 수수나 옥수수를 빚어 만든 술로 색이 하얘서 백주, 백성의 술이라고 해서 백주,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 이백이 좋아하는 술이라고 해서 백주라고 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나는 이백의 이름을 딴 해석을 좋아한다. 계림을 떠나 광서자치구, 귀주, 하이난, 사천, 운남, 산서, 감숙성 등 가는 곳마다 새로운 바이주를 만났다. 분주, 노주노국, 서봉주, 주천주, 죽엽청주 등 이름도 제각각이었고 제조방법도 다 달랐지만 모두 훌륭한 술이었다. 그렇다고 값비싼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우리 돈으로 한 병에 일 이만 원 정도면 천하의 마오타이주가 부럽지 않은 좋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바이주는 매일 저녁의 여독을 풀어주는 벗이었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하늘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하늘에 주성이 있지 않을 것이요,

땅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 응당 주천이 없으리라.

                        -이백의 <월하독작>에서   

  

마침내 나는 제대로 이백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가 왜 술을 찾아 중국의 각 지역을 돌아다녔는지 알게 되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하마터면 그날 이후 나는 바이주에 대한 사랑을 잃을 뻔했다.   


  

몇 달이 흘러 운남성에 있는 석림 지역을 촬영하러 간 때였다. 그곳은 중국 현지에서도 섭외가 어려운 곳이었는데 운 좋게도 지역 공산당의 특별허가를 받게 되었다. 촬영 전날 허가를 내준 그 공산당 간부에게 우리는 저녁을 대접했다. 중국은 감사 인사를 식사 대접으로 한다고 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우리를 외딴 산속 밭 한가운데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데리고 갔다. 흙으로 된 맨바닥에 상이 차려져 있었고, 가마솥에서 꺼내 온 오리 요리 등 그곳에서 키운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차려졌다. 중국에서도 자연식 바람이 불어 믿을 만한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로 만드는 곳이 주목받는다고 그는 우리에게 귀띔했다. 하지만 주변 민가 하나 없는 한 밤의 외딴 산속 비닐하우스는 아무래도 묘한 곳이었다. 어쩐지 옛날 민담 속에서 귀신을 만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찜찜함이 있었다. 아침에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묘지만 덩그러니 남을 곳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나는 그 공산당 간부와 작은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짧은 머리에 토실토실한 몸, 어딘지 첨밀밀의 따거 같은 느낌이 나는 얼굴이었다. 웃는 눈이었고 연신 싱글벙글 웃는 남자였다. ‘따거’는 그런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휴대용 알루미늄 술병에 자기가 직접 담았다는 바이주를 가지고 왔다. 노란색의 옥수수로 만든 바이주. 60도에 달하는 순도 높은 술이라고 그가 자랑했다.  

    

그는 큰 물잔에 그 바이주를 가득 채우더니 나에게 건배 제의를 했다. 그러더니 단숨에 자기 잔을 비워버렸다. 나는 원래 조금 마시고 내려놓으려 했었다. 건배를 하고 잔을 비우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도저히 원샷을 할 양이 아니었다. 따거는 그런 나를 보고 웃는 눈짓으로 ‘깐’(다 비워라.)하라고 권했다. 괜한 오기가 들게 하는 도발적인 웃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참았어야 했다. 깨끗하게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어야 마땅했다. 술싸움이란 자고로 백해무익한 일 아니던가? 하지만 ‘싸나이’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우리 팀의 수장으로서, 또 한국의 대표로서 중국 공산당 일개 간부에게 질 수는 없었다. 나는 결연한 각오로 잔을 비웠다. 60도에 가까운 술. 식도로 불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결국 내리 7잔을 ‘깐’하고야 그날 저녁의 자리가 끝났다. 그가 마신 만큼 나도 마셨고, 우리는 서로 적장을 인정하는 미소를 보내며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하지만 그날 밤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멀쩡히 일어났으나 호텔 방에서의 비참한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토했고, 이럴 수 있나 싶게 계속 토했다. 푸른 위액을 다 쏟아내고도 구토는 끝나지 않았다. 내 평생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다음 날 촬영이 난감했다. 걸어도 어지럽고 차를 타면 더 심했다. 촬영장에서 도착해서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안개가 자욱해 오전 촬영은 불가능했다. 오후가 되어 간신히 몸도 추슬러졌고 안개도 걷히기 시작해 촬영은 속개할 수가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바이주는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몇달 동안 달아올랐던 바이주에 대한 내 사랑은 급속하게 식어버렸다.      


며칠간의 촬영을 무사히 마시고 떠나기 전날 공산당 ‘따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환송연을 해준다는 거였다. 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떠나는 길이라고 결례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저녁이 되어 초대받은 식당으로 가자, 아니나 다를까 따거는 장총처럼 큰 술병을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도저히 이 난국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에겐 13척의 판옥선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나에게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위장과 간 뿐이었다. 

     

같은 중국식 원형 테이블에 ‘따거’와 나 그리고 우리 팀 몇 명이 함께 앉았다. 그는 웃으며 그동안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덩치가 산만한 러시아나 미국 코쟁이들도 술 대결에서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KO패 당했다. 이 외딴 시골에서 그는 술로 세상의 다른 지역 남자들을 제압하는 중국의 영웅이었다. 오늘은 나를 침몰시키려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는 커다란 물컵에 술을 따라 나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받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잔. 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갈 선택을 해야만 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되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합성 팀장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감독님, 제가 놈을 상대해보겠습니다. 호리호리한 몸의 그는 장비의 한칼에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은 무명 장수에 불과해 보였다. 딱히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였다. 적어도 그는 하나의 비책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는 없지만.    

  

장비가 원샷을 권하자 팀장이 색다른 제안을 했다. 원샷을 하되 맥주와 섞은 한국식 폭탄주를 마시자는 거였다. “오호 재밌겠다!” 장비가 어떤 술이든 마다할 텐가? 장비는 미끼를 덥썩하고 물었다. 팀장과 장비는 순식간에 폭탄주 세 합의 대결을 펼쳤다. 잠시 후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하늘을 찌르는 기세를 자랑하던 장비가 그 자리에서 푹하고 고꾸라지고 만 것이었다. 장비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빠가빠가’하는 의성어를 중얼거리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안 물어봐도 짐작으로 알 수 있었지만 로케이션 매니저에게 무슨 소린가 물어보니 땅이 띠웅띠웅 돌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그렇게 쓰러진 장비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비서에게 실려 가 버렸다. 폭탄주를 처음 마셔본 중국인은 폭탄주에 나름 단련된 우리 한국인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이주 대전’은 우리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다음날 떠나면서 비서에게 전화해보니 장비는 출근을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유쾌한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바이주에 대한 내 사랑은 그렇게 다시 돌아왔다.   

  



그 뒤 중국의 공동 제작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귀하다는 마오타이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명불허전. 과연 대단한 술이었다. 하지만 술에 관한 나의 미각이 뛰어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마셔본 바이주에 비해 특별히 뛰어난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족속은 남들이 인정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 아니던가. 돌아오는 길에 진짜 마오타이주 한 병을 선물 받았다(워낙 가품이 많아서 거리에서 사는 것은 거의 진품이라 보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귀한 사람들과 마시리라 그 술을 소중하게 보관해두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마오타이주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언제 이 술을 개봉하게 될까? 인생은 새옹지마. 오늘의 복이 내일의 화가 되고 내일의 화가 다음날의 복이 된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꿋꿋이 이 마오타이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이 귀한 바이주를 고생한 벗들과 나눌 흐뭇한 그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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