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것들 21
도쿄역 바로 앞에 인터미디어테크가 있다. 수년 전 그곳을 찾아갔을 때, 나는 블랙홀로 빨려드는 별처럼 즉시 빨려들고 말았다. 의식이 또렷한 채로 꿈의 지배자 샌드맨의 거주지를 걷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헤매고 있지만 헤매지 않는 느낌, 헤매지만 딱히 헤매고 있지 않는 느낌. 꿈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을 켜켜이 쌓아둔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아무렇게나 배치한 것 같은데 질서가 있었고 질서 속에 또 무질서가 있었다. 반나절을 나는 그렇게 꿈의 왕국에 찾아간 방문자처럼 넋을 잃고 인터미디어테크를 돌아다녔다.
인터미디어테크(Intermediatech)는 일본의 우정국과 도쿄대가 협업하여 그들의 컬렉션들을 전시하기로 만든 공간이다. 만약 옛날 우정국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기존의 유산을 모아 박물관을 짓는다면 당신은 그 내부 전시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대부분 우리가 기존에 봐왔던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터미디어테크는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창의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우정국이 도쿄대를 초대한 것부터가 신선하다. 우정국이 왜 도쿄대에 컬래보레이션을 제안했는지 그 생각의 실마리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우편배달과 대학교 사이에 도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그 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라곤 설립한 지 오래되어 역사적인 컬렉션이 많았다는 것뿐이지 않았을까? 거꾸로 생각해봐서 내가 우정국 박물관 설립 담당자인데, ‘모처럼 박물관을 만들게 되었으니 도쿄대와 같이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하고 추진한 사람들에게 나는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로 다른 두 기관의 컬렉션을 같이 전시하기란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우정국과 도쿄대가 다른 것처럼, 당연히 그들이 모아 온 컬렉션들도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다른 두 개의 질서를 하나의 질서로 통합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그들이 찾은 방법은 질서가 아닌 무질서였다. 인터미디어테크를 돌아다녀보면 무질서와 혼돈 속을 제대로 헤매는 느낌이 든다. 전시품들은 아무런 연관 관계나 분류 체계 없이 놓여 있다. 매머드의 화석 바로 옆에 증기 기관의 배관이 놓여 있다. 보통은 화석들이 죽 전시되어 있고 다른 방에 증기 기관 관련 전시품들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미디어테크는 그런 기존의 관습적인 생각을 철저하게 부수어버렸다. 거기에 체계와 범주는 없었다. 범주란 게 만약 있긴 하다면 오직 미학의 범주뿐일 것이다. 그 미학이 주는 쾌감이 너무나 낯설고 강렬하여 그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된다.
소박하지만 나의 작업실을 만들 때, 제일 영감을 주었던 공간이 인터미디어테크였다. 그동안 촬영과 여행을 다니면서 수집해온 책과 소품들. 공룡과 샌드맨과 열국지와 아키라와 알프레드 큐빈…. 그들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그들 사이에 딱히 공통점이라곤 없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내 인생의 여정을 통해 내가 아끼고 좋아했던 것들이라는 것뿐. 나는 그것들을 인터미디에테크에서 배운 대로 무질서하게 늘어 놓았다. 내가 생각한 단 하나의 원칙은 미학 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작은 혼돈의 왕국이 탄생했다.
새롭게 생긴 작은 왕국의 군주로서 말하거니와, 막상 해보고 나니 군주가 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도전해볼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