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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Feb 13. 2021

중국어 사부님의 한시 부채

내가 사랑한 것들 8

8. 중국어 사부님의 한시 부채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가?    



      

2017년 초봄. 영화 작업이 막바지에 달해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홍대 상수역 쪽으로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렸고, 부푼 마음을 안고 거기로 달려갔다. 나는 그날을 사랑했다. 삶의 커다란 위안이었다. 인생의 희노애락이라면 웬만큼 겪어봤을 나이든 남자에게 그토록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2015년, <점박이 2>의 배경을 찾아서 중국으로 로케이션 헌팅을 갔었다. 공룡이 살만한 원시 숲을 찾노라니, 당연히 귀주, 계림, 운남, 내몽고 등 중국에서도 가장 오지 지역들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웬만큼 큰 도시 호텔에서도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코디를 통해 일을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새벽이나 저녁에 혼자 움직일 때 바디랭귀지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원래 새벽형 인간이라 여행이나 촬영을 가면 현지에서 새벽시장을 가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숙소 주변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즐긴다. 소위 ‘나와바리 탐색’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이 안 통하면 도통 재미가 없다. 시장에서 물건값도 물어야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이는 가게에서 흥정도 해야 한다. 

    

중국어를 배워야지. 한국에 돌아와서 중국어를 배울 방법을 찾았다. 중국어에 접근하는데 제일 첫 번째 장애는 ‘성조’에 대한 공포였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성조를 배우다가 질려서 중국어를 포기한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영어를 배워보면 알지만, 우리가 어디 영어 인터네이션(성조)에 능하던가? 외국인이 다른 언어의 악센트를 제대로 습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외국인이 말을 하면 악센트가 어색해도 알아듣는 법이다. 우리도 파키스탄 사람이 한국말하면 비록 그 사람 말이 악센트가 어색할지라도 잘 알아듣지 않느냔 말이다. 나는 중국어도 역시 성조가 본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차에 유뷰트에서 기이한 한 인물을 만났다. 산발한 곱슬머리, 찰진 경상도 사투리, 유창한 언변, 엄청난 에너지. 딱 봐도 재야의 고수, 기인의 풍모였다. 나는 ‘고수’를 보자마자 빨려들었다. 유튜브에 몇 개 떠 있는 콘텐츠를 찾아보니 과연 탁월했다. 그는 몇십 년간 독학으로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해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독창적인 생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온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의 ‘김성민 앓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산에 계신 분이라 직접 배울 방법이 없었다. 찾아보니 ‘김성민의 중국어세상’이라는 인강 사이트가 있었다. 그가 개발한 방법으로 배운 중국어는 말도 안 되게 쉬웠다. 중국어는 우리말의 심한 사투리인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사실 중국어는 90% 이상 우리말과 단어가 같다. 문법구조가 다르지만, 같은 한자 문명권이라 사고의 흐름도 거의 비슷하다. 게다가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강의는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회의를 하거나 작업 컨펌을 하는 짬짬이 이어폰을 듣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인강 사이트에는 중국영화 시나리오 강의도 있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첨밀밀>과 <동사서독>을 찾아서 들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계속 듣다보니 따라갈 수는 있었다.      


한 달 정도 인강을 듣고 중국으로 2차 헌팅을 갔다.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가 묵는 중국 시골 마을에는 보통 차관이 하나는 있게 마련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바리 탐색’을 하다 차관이 보이면 들어갔다. 더듬더듬하지만 그래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신기한 경험들이 쌓여갔다. 중국은 땅이 넓어 10시간이 넘는 장시간 이동이 예사였다. 나는 차멀미가 심한 편이라 차 안에서 책을 보지 못한다. 컴퓨터로 영화를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들을 수는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동사서독>을 들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장국영과 양조위, 장만옥의 대사 위로 옥수수밭으로 된 지평선이 지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흘러가고, 사막이 나타나고 사라져갔다. 


중국 촬영을 마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메일이 왔다. 김성민 선생님이 처음으로 서울에서 오프라인 강의를 한다는 거였다. <영화 중국어> 강의가 있어서 바로 신청을 하고 날을 기다려 홍대 쪽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갔다. 막 목련이 피기 시작한 봄의 저녁이었다. 고대했던 연인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나이 들어 오랜만에 느끼는 들뜬 느낌으로 사무실이 있는 골목을 찾아 걸었다. 인사를 하고 보니 그 역시 나처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향적이고 진중한 느낌. 하지만 강의를 시작하자 그는 내면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으로 돌변했다.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금세 두 시간이 지나갔다.   

   

정작 영화 중국어 강의보다 더 좋았던 건, 다음 시간 강의인 한시 강의였다. 나는 한시는 신청을 하지 않았던 터라 청강을 하고 나서, 그 강의도 바로 신청을 해서 들었다. 이백과 두보 등 한시를 중국어로 배울 수 있었다. 시 한 편씩을 중국어로 읽고 뜻을 해석하다 보면 또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학생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중국과 사업을 하시는 분도 있었고 학생도 몇 명 있었다. 뜻밖에도 중국어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도 계셨다.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김성민이란 한 인간의 매력에 감염된 '김성민 빠'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한 인간의 스토리텔링이 우리를 모이게 했던 거였다. 


원어로 이백의 시를 읽고 듣는 그 첫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誰家玉笛暗飛聲  어디서 날아오나 밤중의 피리소리

散入春風滿洛城  봄바람에 흩어져 낙양성에 가득하네


눈 앞에 정경이 펼쳐지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옥피리 소리가 들려와 봄 밤 꽃 향기속으로 사라져갔다. 목련 핀 밤, 나는 그 시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두 달의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한시를 조금씩 시인의 언어로 이해하고 느끼게 되었다. 언어는 특히 시는 번역으로 느끼기 어렵다. 특히나 말의 느낌은 불가능하다. 이 강의를 통해 그런 느낌을 이해하게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명의 인생의 사부를 만났다.     



두 달간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책걸이를 했다. 그때 주신 선물이 사부님이 직접 쓰신 부채였다. 흰 색 천에 검정색 글씨로 우리가 배웠던 이백의 시가 적혀 있었다.     


 聽蜀僧濬彈琴 - 작 李白     

          촉승의 거문고 듣고    


蜀僧抱綠綺 촉승포록기     촉나라 중이 거문고를 안고서  

西下峨眉峰 서아아미봉     아미산봉을 서쪽으로 내려와     

爲我一揮手 위아일휘수     나를 위해 한바탕 타니 

如聽萬壑松 여청만학송     나그네 시름 흐르는 물에 씻고   

客心洗流水 객심세류수     만학의 소나무 울듯 하네     

餘響入霜鍾 여향입상종     여운은 서리에 우는 종에 드는듯 

不覺碧山暮 불각벽산모     어느덧 푸른 산에 날이 저물고 

秋雲暗幾重 추운암기중     어두운 가을 구름 겹겹이 쌓였네

          

지금도 가끔 부채를 들고 새벽에 이백과 두보, 백거이를 읽는다. 그 맛을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돈 안드는 호사로는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따라오기 어렵다. 인생의 인연은 기이하다. 내가 이런 새벽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누가 인정해주건 말건 자신의 길을 찾아서 묵묵히 걸어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잠깐의 위안을 준다. 나의 삶도 그럴 수 있기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기를.


ps. 강의는 그 뒤에도 두세 번 이어졌다. 우리는 한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삼국지평화 등 고문도 공부했다. 좋은 날은 이어지기 어려운 법인가? 안타깝게도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강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코로나가 끝나고 사부님을 모시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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