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사를 통괄하는 산업혁명 클래스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확산되던 90년대 후반 그 즈음을 기억하시나요? 포털 검색, 메일 서비스가 등장했고, 쇼핑, 게임, 언론매체, 커뮤니티 서비스를 중심으로 차츰 온라인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지요. 저는 1998년 대학 여름방학 때 놀러온 초등학교 친구와 학교 전산실에서 놀다가 친구가 알려준 이메일 계정을 처음 개설하고 매우 기뻐했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잠시 추억 속에 빠져보실까요?
비영리 단체인 ‘인터넷 아카이브(Internet Archive, archive.org)’에서는 인터넷 사이트 및 기타 문화적 인공물을 디지털 도서관 형태로 구축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같은 느낌으로 여러분이 보고 싶은 웹 사이트의 당시 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국민 포털이죠, 1998년도 네이버의 초창기 모습입니다. 현재의 초록색의 브랜드 테마를 사용하기 전으로 텍스트 위주의 링크만 잔뜩 걸려있는 초기 모습이 색다르네요. 당시에 국산 포털이 나오기 전에는 대부분 야후!가 대표적이었지요.
당시 야후!의 모습에 추억에 잠긴 분들도 꽤 많으실 것 같은데요.(웃음) 국산 포털보다 우선 정보가 나름 방대했지요. 전 세계 월드와이드웹 서버가 분야별·장르별로 메뉴화 되어 있어 원하는 분야를 검색하는 데 편리한 포털 사이트였습니다.
이 외에도 국내에선 다음, 네띠앙, 드림위즈, 야후 등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다양한 포털 사이트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삭제되었거나 서버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당시 여러분이 만들었던 홈페이지도 운 좋으면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시 만들었던 상업용, 개인용 홈페이지도 꽤 많았는데 지면상 공개하기 어렵지만 상당수가 아카이브에 남아있어 가끔씩 추억에 잠기곤 한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큰 성공을 구가했다가 문을 닫았거나 거의 이용하지 않는 웹 서비스들도 있었는데, 바로 2000년의 ‘아이러브스쿨’과 2003년의 ‘싸이월드’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페이스북이나 SNS의 원조 격으로 볼 수 있는 인맥 네트워크를 활용한 훌륭한 K-서비스를 선보였지만 운영상의 실책으로 결국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죠.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장기적 관점의 운영 전략을 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직도 안타까운 기억을 갖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었습니다. 얼마 전 싸이월드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많은 누리꾼들이 추억 속 사진 등의 데이터를 백업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려야 했던 일이 있었는데요. 다행히 다시 서비스를 재개하게 되어 현재까지 운영은 되고 있으나 명목상의 운영일 뿐, 이용자는 이미 달라진 플랫폼에 떠난 지 오래죠. 아직 사진 백업 못하신 분들도 많죠? 내 사진 내놔!
아무튼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닷컴 벤처기업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제조 기반 사업체와 달리 컴퓨터와 인터넷, 아이디어, 소규모 자본만 있으면 누구나 진입장벽 걱정 없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죠. 현재 우리나라 ICT 비즈니스의 근간을 세운 벤처 1세대도 모두 이때 등장한 창업가들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IT기업들이 시도했던 인터넷 서비스들이 과도기적인 인터넷 기술에 너무 많은 것을 융합하려다 보니 너무 시대를 앞서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실험이 전 세계적으로 속출하면서 미국 발 닷컴버블이 발생하기도 하였죠.
닷컴 버블을 짧게 해설하자면, 당시 미국 경기는 인터넷, PC 보급에 따른 노동 생산성 혁명으로 최장기(1991~2001년) 호황을 만끽하며 막연한 낙관론이 증폭되던 시기였습니다. 주식 투자자들은 인류가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신경제(new economy)’의 지평을 연 첨단기술에 열광했지요. 미국의 PC 소유 가정은 1990년 전체의 15%에서 2000년 51%로 불어났고, 인터넷은 정보 격차 해소와 가상(cyber) 공간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아마존과 아메리카온라인(AOL), 야후! 등이 내놓은 미래의 눈부신 사업 모델을 접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전문가와 미디어는 기업 가치를 과거의 이익으로 평가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정보기술(IT) 신대륙을 향한 ‘골드러시’를 자극했습니다.
나스닥의 비이성적 낙관론은 전 세계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외환위기 여파로 신음하던 한국에서조차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지요. 1999년 봄 코스닥 시장에선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즈(골드뱅크)라는 회사가 ‘인터넷으로 광고를 보면 현금을 준다’는 독특한 사업 모델로 투자자를 모으며 그해 2월 초까지 15일 연속 상한가를 달렸는데 1년 만에 몸값이 50배인 4,000억 원까지 치솟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무료 인터넷 전화’ 사업을 내세운 새롬기술이 등장하며 1999년 8월 상장 6개월 만에 무려 150배 가까이 폭등해 단숨에 코스닥 황제주로 떠올랐습니다. 그 후 한글과컴퓨터(창업자 이찬진), 국내 최대 포털 다음커뮤니케이션(이재웅)이 수개월 만에 수십 배 오르는 주가 상승세에 동참한데 이어, 1998년 한게임커뮤니케이션(김범수)이란 회사가 등장했고, 당시 ‘리니지’란 게임으로 관심을 모은 게임업체 엔씨소프트(김택진)도 코스닥 상장 채비를 서둘렀죠. 1998년 말 2,000개 수준이던 벤처기업은 2001년 1만 개를 돌파하며 무섭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코스닥 시장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폰지(다단계 사기) 형태로 불러들였고 ‘묻지마’ 투기장으로 변해갔죠. 다수의 벤처기업은 높은 주가를 이용해 주식을 마구잡이로 찍어낸 뒤 투자자의 돈으로 새로운 회사를 인수했고, 주가가 너무 비싸지면 주식을 쪼개거나(액면분할), 더 많이 찍어 공짜로 나눠주는(무상증자) 방식으로 다시 싸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기업 이름에 ‘닷컴’ 또는 ‘인터넷’을 넣는 사명 변경도 급증했죠. 대다수 닷컴 기업이 실상 적자였고, 주가를 떠받칠 연료는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비실대던 코스닥 지수는 2000년 2월 7일 사상 최대폭(10.0%)으로 급등하며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운 뒤 3월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정부와 거래소는 이후에도 수많은 코스닥 시장 신뢰 개선 방안을 쏟아냈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코스닥은 기준지수(1,000)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