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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퍼즐도사 Jun 23. 2023

이제 4갤 된 백수의 주저리

인생에도 브레이크를 밟는 게 필요해요

약 4개월 전에 4년 반동안 일했던, 애증의 첫 회사를 드디어 그만뒀다. 회사의 망조를 느끼고 진작에 퇴사한 친한 동료들은 왜 그렇게까지 그런 곳을 오래 다니냐며 의아해했지만, 나는 나를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오랜 유학 생활 후에 과연 내가 한국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마음, 그뿐이었다.


12년 간의 유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호기롭게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지 거의 6년이 돼 간다. 나의 첫 백수 생활은 귀국 후 첫 1년, 한국에서의 적응기를 가질 때였다. 하지만 퇴사 후 백수 생활을 다시 해보니, 졸업 후 취업 전에 잠시 쉬었던 것과 지금의 백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그 거리가 굉장했다.



백수 1개월 차.

여전히 직장 노예의 마인드셋을 탈피하지 못하고 next step에 대한 조급함이 일렁거렸다. 이 회사에선 이 연봉을 받고 이런 일을 했는데, 어떻게 더 연봉 점프업을 할 수 있을지, 내가 원하는 복지가 있는 회사는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에 급급했던 때도 있다. 하지만 첫 회사에서 4년 반동안 죽이라도 쑬 생각으로 악착같이 버틴 나를 위한 보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조바심이 올라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잘라내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되나,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나 걱정이 되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다.


백수 2개월 차.

퇴사하면 꼭 이루고 말겠다는 발리 한달살이를 실천하기 위해 발리로 떠났다. 여행을 계획할 때에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성비 있는 여행을 하라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과감히 묵살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좀 누려야 하지 않나 싶어 돈 생각하지 않고 직항 항공권과 5성급 호텔로 한 달 치 숙박비를 결제했다.


보고만 있어도 편안해지는 넓은 바다와 푸른 하늘을 보니 여행 직전까지 날뛰던 '이래도 되나'라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발리에서 대부분 한 것이라곤 인피니티 풀에서 수영하고 피냐콜라다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출출해질 때면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싶은 것을 먹은 거였다. 저장만 하고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도 하고, 연달아 마신 맥주로 취기가 올라오면 미러볼을 켜두고 음악에 심취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 호텔 안에서만 있기가 무료해질 때면 호텔에서 스쿠터 하나를 빌려 발리 곳곳을 누볐다. 발리에서는 단돈 3천 원으로 스쿠터를 하루종일 굴릴 수 있는 기름을 채울 수 있다. 그렇게 하루가 모자랄 만큼 발리를 열렬히, 또 온전히 느꼈다.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백수 3개월 차.

한 달간의 발리 한량놀이 영향이 컸던지, 나도 모르게 백수 마인드셋을 장착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일하지 않는 하루가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하루하루를 채우는 재미를 느꼈다. 미래에 대한 조급함이나 불안감 따위 경험하지 않았고, '이대로도 퍽 나쁘지 않군'이라는 평안한 마음이 자리 잡았다. 지금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찬 매일이었다. 커리어에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닌 인생 진로라는 큰 그림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안정적이겠지만 은퇴까지 20여 년 남짓 남은 직장 생활에만 연연하기엔 내 남은 인생은 꽤나 길었다.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요즘 하도 기술이 좋아 정말 내가 100살까지 살지, 150살까지 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긴 시간을 앞두고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딘지, 또 그곳까지 도달하려면 지금 어떤 고민을 시작하고, 어떤 방향에 바라보고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게 내 인생에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탐색하는 시간이 의미 있는 투자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가족의 달을 맞이했다.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기여서 그런지, 나에게 재결합의 손을 내미는 부모님이 부담스럽지 않고 내심 반갑게 느껴졌다. 1년 만에 다시 부모님과 교류하면서 그간의 인생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으로 엄마의 남편이 아닌, 아빠의 아내가 아닌,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따뜻한 한 달이었다.


백수 4개월 차. 현재.

정말 오랜만에 가족 여행이란 걸 다녀왔다. 그것도 장장 일주일 동안 엄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백수였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아빠랑은 20년 만에 단둘이 동네에서 운동을 했다. 저녁도 먹고 식후 오미자차도 마시며 말이다. 부모님을 손절한 지 딱 1년이 된 이 시기에,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부모님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게 신기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 아닌가 싶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시기에 딱, 나의 오랜 숙제라고 여긴 부모님과의 갈등이 이렇게 전개가 되다니. 어쩌면 백수 생활을 결심한 게 신의 한 수였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은 부모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여태껏 나는 지난 4년 반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천천히 뜯어보니 4년 반이 아니라 십 년이다.


딱 십 년 전에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간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대인공포증을 얻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내 얼굴을 갈기갈기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어떡해서든 견뎌보고자 심리학을 붙들으니 조금 살만해졌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아끼던 사촌 동생을 우울증에 잃었다. 내 신체의 일부가 도끼로 잘려나가는 듯한 묵직한 상실을 경험했다. 내가 귀국을 결심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제대로 애도할 틈도 없이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느라,  첫 취직에 적응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내다 적응해질 만하니 부모님의 이혼 소송이 시작됐다. 웬만한 막장드라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정말 피 튀기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러다 내가 피 말라죽을 것 같아서 다시 외국으로 잠적해 버릴 생각까지 하다가 결국 부모님을 손절하게 된 거다.


이게 내 지난 10년이었다.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 정말 사무치도록 힘든 시간들이었다는 게 체감된다. 하지만 놀라운 건, 저렇게 처참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할 도리 다하며 놀 것 다 놀았다. 때때로 마주하는 소소한 행복을 귀하게 여기며 그 어느 하나라도 놓지 않으려고 가슴 깊이 느끼며 많이 웃고 산 내가 너무 대견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동시에 애처로웠다. 그동안 얼마나 '행복한 삶'에 갈망이 컸으면, 얼마나 아득바득 버티려고 혈안이었으면, 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노고를 알게 된 걸까. 살기 위해 너무 처절히도 열심히 버틴 과거의 내 모습이 짠해 눈물이 난다. 앞으로는 조금 덜 열심히 살더라도, 그간의 노고를 알아주고 그 자리에 위치한 자신을 격려해 주는 좀 더 따뜻한 내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백수가 되어보니 알게 된 나의 진정한 욕구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꺾여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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