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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퍼즐도사 Jan 21. 2022

그래요, 저 금수저예요.

처음으로 내뱉어 보기

오랜만에 상을 받았다.



재작년에 연차까지 쓰며 열심히 활동했던 지역사업 개발 프로젝트가 이제야 빛을 보나보다. 우리 팀이 정말 열심히 했고 우리 사업이 올해 추진된다며 이에 대한 공로로 표창해주셨다. 팀원들과 함께 일궈 낸 결과물인데 그 팀의 리더라는 이유로 내가 대표로 시장 표창장을 받게 됐다. 생각지도 않은 표창장에 어안이 벙벙하고 같이 활동한 팀원들한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거리가 생겨 넙죽 받았다.


이 시장 표창장에 대해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신다. 주변 친한 지인들한테 자랑도 엄청 하고 다니신 것 같다. 그리고 며칠 전, 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00 시장한테 표창장 받았다며? 축하한다.

그 친구가 내 고등학교 후배야. 00시에 특채 자리 있으면 지원해봐. 너 같은 인재는 바로 될 것 같다.’



삼촌의 말에 갑자기 기분이 우울했다. 그저 후배라고 한 말이 마치 나에게 부정 채용을 종용하는 것 같아서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근데 설령 삼촌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들, 따지고 보면 삼촌은 다 나 잘되라고 밀어주겠다고 한 말 아닌가. 좋아하는 삼촌인데 갑자기 거북해질 만큼 내가 윤리 의식이 그리 투철했던가? 부정 채용 제안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삼촌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우울감에 빠져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생각했다.






편한 인생을 산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혹은 열등감, 그리고
편한 인생을 산다는 이유로 내 노력과 결실이 통째로 폄하될까 걱정하는 마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니 도달한 결론이다. 삼촌이 정말 순수하게 고등학교 후배라는 걸 알리고 싶었을 수도 있는데, 내가 으레 부정 채용 제안으로 생각해서 혼자 몇 시간 동안 기분 나빴던 이유는 이렇다. 무엇이든 항상 편한 길만 보여주려고 한 내 부모님이, 또 그들의 인맥과 서포트가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하고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게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에겐 열등감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 감정이 처음 생겼을 땐 언제였을까라는 질문을 계기로 뇌 저 구석에 한참 동안 처박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초등학교 에피소드들이 생각났다.



열등감의 시작

그린벨트 지역이 많아 아침에 닭이 우는 소리에 하루가 시작되던 때가 있던 우리 동네는 그 유명한 스타벅스가 생긴 지 이제 고작 3년밖에 안 되는 그런 곳이다. 지난 몇 년간 아파트를 짓는다고 풀어 준 그린벨트 지역을 팔아 떼부자들이 좀 생기긴 했지만, 2022년의 우리 동네는 여전히 교통편도 안 좋고 개발할 지역이 더 많은, 소위 ‘촌 동네’이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쯤, 우리 부모님은 이 동네에 정착해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사업이 빠르게 번창하면서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다 알 정도로 우리 집은 잘사는 집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가정환경 조사의 명목으로 부모님의 직업과 가계소득을 써서 제출하게 했다. 어느 사회 수업 중, 첨단 기술 예시로 드럼세탁기에 대해서 설명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드럼세탁기가 집에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손을 든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 역시 너는 집이 잘살아서 드럼세탁기가 있나 보구나!'



저 선생님의 한마디로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처럼 난 엄청난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경험했다. 50여 명이 있는 학급에서 나만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이날 이후, 내 학교생활은 더는 예전 같지 않게 됐다.


새로운 물건을 가져가면 항상 명품이냐고 묻는 말들, 너는 잘사니까 준비물 더 챙겨 오라는 요구, 그리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재수 없다며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의 모습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말 한 순식간에 나는 온갖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왕따는 아니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 ‘은따'가 됐다.


더 이상 학교 가는 것이 재밌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자유분방했던 나였는데, 내 행동에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려는 친구들의 모습에 혼자가 더 편해졌다. 나는 무시와 외면으로 괴롭힘에 대응했고 2년 정도 지나니 어느새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됐다. 날 괴롭혔던 같은 반 친구들을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중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중학생이 됐다. 초등학교 때 한껏 위축되었던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가진 못했다. 내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온 친구들이 하나같이 놀라워했다. 이렇게 넓은 집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냐며 자기들끼리 신나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집을 구경했다. 어린 손님들이 왔다며 마실 것과 과자를 준비해주신 분이 우리 엄마가 아니라 가정도우미라는 사실도 그들에겐 충격처럼 다가갔을 것이다. 내게 당연했던 모든 것이 그들에겐 생소하고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우리 집에서 경험한 것들을 친구들이 학교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부러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돌고 돌아 결국 내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귀까지 흘러가게 됐다. 그렇게 다시 표면으로 올라온 내 은따 이야기. 이때다 싶어 나에게 등을 돌리는 친구도 있었지만, 다행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 남아있었다.



열등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

친구다운 친구가 있어서 중학교 생활을 무난히 보냈지만 중학생의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때 생긴 내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돈에 관련된 것들에서는 항상 언행을 조심히 했다. 이 열등감이 유학 결심에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처음 해본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검소함과 겸손을 미덕으로 삼은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이 기저엔 초등학생 때 경험한 그 상처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너무 늦게 알아 차린 건 아닌가 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됐다.



또 누가 보면 재벌 3세쯤이나 돼서 호들갑 떠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이 그랬다. 주변인들과의 격차에서 오는 당황감이 어린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혹여나 부모덕을 크게 보고도 저 모양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참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치 온 세상이 ‘그건 네가 잘사니까 당연한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가치에 대해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부모님이 닦아 둔 편한 길을 마다하고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는 곳에서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일들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세상에 빚진 사람마냥 봉사 활동도 정말 많이 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학생들에게 매주 무상으로 과외해주기도 하고 기부도 습관처럼 하면서. 하지만 적극적인 봉사 활동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혼자만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더 크게 만든 것 같다. 사고 싶은 것이 있거나 여행 가고 싶을 때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 돈이 정말 간절할 텐데'라며 내 욕구와 항상 씨름했다. 결국 내 욕구에 손을 들어주며 나름 나 자신과 합의 본 것은 큰 소비를 할 때마다 그만큼 기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사회를 위한 선의의 행동들이었지만, 이건 내가 정말 선한 사람이라서 한 행동들이 아니라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행을 조심하고 마치 위장한 것 마냥 그 ‘금수저' 꼬리표를 꽁꽁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생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난 여전히 금수저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가 사실 딱히 나쁜 말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매번 얼버무리며 지나가지만 사실 불편했다.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부모님으로 인해 생긴 그 꼬리표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저 내 인격적인 면모와 능력으로만 나를 바라봐줬으면 했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이 잘사는 것이지 내가 잘사는 것은 아니니까.






나에 대해 알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난데 아직도 이렇게 알아갈 것이 있다니!

 

표창장 축하 전화를 계기로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상처와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알게 되어 속이 시원하면서도 짠했다. 그간 나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을까, 스스로 얼마나 나 자신을 구속하며 살았을까,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나의 심리상담을 수개월 째 담당해주신 상담사 선생님께 이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해봤다. 에피소드를 쭉 들으시곤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됐을 때 내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그래, 나 잘살아. 맛있는 거 먹으러 우리 집에 놀러 올래?’라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라며.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너무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듯한 말인 것 같아서. 하지만 듣고 보니 나조차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집에 한 번쯤 놀러 가고 싶은 걸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전략 같다.


선생님은 그 친구들이 시기와 질투도 있었겠지마는 그때 얼어붙었던 내 모습을 약점 잡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상담을 하며 봐왔던 내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껏 위축된 모습이 보아하니 어리고 연약했던 그때의 나는 더 그랬으리라 말을 덧붙이셨다. 그래, 약점을 갖고 놀리기 좋아하는 그 나이 애들은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나는 이것을 더 이상 약점처럼 여기지 않기로 다짐했다. 가진 것에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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