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구장창 체크인 줄을 기다린 끝에 1시간 만에 비행기 티켓을 수령했다. 친구들에게 타령을 해대던 면세는 3년 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인 탓에 면세점 아이디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3번의 로그인 실패 끝에 비밀번호 재설정과 결정 장애 콤보로 3시간 전 샵 아이템들까지 시간이 초과되어 버리는 바람에 결국 아무것도 구입하지 못한 채 떠나보냈다. 공항 열차를 다시 한번 타고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미 마닐라를 10번도 더 들락인 동생은 세부 퍼시픽 탑승 게이트로 이동하는 순간 그곳엔 정말 아무것도 없을 테니 공항 열차를 타기 전 꼭 뭔가를 먹으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에이 설마 단 하나도 없겠어? 예전에 파리바게트도 잠바주스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동생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파리바게트와 잠바주스가 여전히 있긴 했다. 다만 영업을 하지 않았다. 면세점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점포들이 열지 않았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버리면 마닐라에 자정 즈음에 떨어지기 전까지 기내에서 판매하는 컵라면 정도를 먹거나 아니면 공복을 유지해야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 아직 공복에 손이 떨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아직 나 공복이라도 손조차 떨리지 않을 만큼 건재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자정까지 공복일 필요는 없는데?
비행기에 타기 전에 뭐라도 음식을 사고 싶었다. 푸드 코트는 있었다 왕돈까스 정식 어쩌구 하는 것들과 쌀국수를 팔았다. 굳이 공복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꽤나 배가 부른 채로 비행기에 타서 4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것 역시 그다지 내키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제 보니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강아지를 강아지 호텔에 맡기고, 짐을 싸고, 공항 철도를 타고 공항까지 와서 1시간 체크인 줄을 기다리고, 게이트까지 또 이동하느라 지쳐있던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저 게이트 옆에 앉아 하릴없이 탑승을 기다리기로 했다. 동생이 핸드폰 충전기조차 챙겨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나는 3년째 사용하고 있는 내 핸드폰의 배터리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닳는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 충전기를 챙기지 않았고, 이미 배터리가 60퍼센트인 상황에 혹시나 마닐라에 도착해 동생을 만나지 못하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때 지금 조금 심심하기로서니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며 배터리를 낭비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나도 모르게 폰을 또 집어 들까 봐 팔짱을 낀 채 양옆에서 쏟아지는 따갈로그어를 들으며 태국어, 베트남어와는 또 다른 억양이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롯데리아 봉투를 든 채 걸어가는 한 외국인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롯데리아가 있다고? 그렇다. 롯데리아가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롯데리아지만 당시엔 찬 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롯데리아의 위치를 찾으려다가, 스마트폰 초창기였던 10여 년 전에 종이 지도로 유럽 여행을 다녀왔던 짬바를 살려 공항 내 시설 안내판을 찾아 걸었고, 성공적으로 롯데리아에 들어가 윙 4개를 포장했다. 매장에서 먹지 않고 포장을 한 것은 기내에서 맥주와 함께 하려는 빅픽쳐였다.
비행기는 약 45분가량 연착이 되었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내 왼쪽에는 쌍 무지개가 떴고 오른쪽에선 석양이 붉게 물들었다. 태어나서 쌍 무지개는 처음 봤다. 처음에는 유리를 제대로 안 닦은 것인 줄 알았는데 다시 봐도 쌍 무지개였다. 탑승 지연에 지쳐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나 역시 배터리가 58 퍼 정도 남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내 탑승이 시작되었다. 나는 당연히 아이패드를 챙겨 온 줄 알았다. 넷플릭스에 우영우까지 미리 저장해뒀단 말이다. 하지만 뭐가 그리 급했던 건지, 나는 아이패드를 충전기에 꼽아둔 채 고대로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나와버렸다. 아이패드도 없고 핸드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책 한 권 조차 없었다. 비행기에서 산미구엘 맥주를 하나 주문하고 아까 포장해둔 윙을 뜯는데 살면서 맥주를 이렇게까지 감흥 없이 마셔본 적이 또 있었을까 싶었다. 내 앞에 앉은 필리핀 여자가 영어 자막을 켠 채로 나 혼자 산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간간이 보이는 그 나 혼자 산다 화면을 응시한 채로 무미건조하게 턱 근육을 움직이다가 이럴 바엔 차라리 안 먹지 싶어 윙이 담긴 포장 용기를 다시 접고 맥주를 원샷으로 털어 넣은 뒤 잠을 청했다.
비행기에는 대단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비행기가 채 이륙을 하기도 전부터 잠이 들었고 이내 저 사람 저러다 호흡 곤란으로 죽는 것 아닌가 염려가 될 만큼 엉망진창인 리듬으로 대략 소형 청소기 정도의 성량을 뽐내며 코를 골았다. 그 파급력이 엄청나 그 남자 주변에 앉아 있던 80퍼센트의 사람들이 자리를 옮겼다. 그는 비행시간 4시간 내내 지치지 않고 코를 골았다. 착륙을 마친 후에도,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서 주행을 하는 와중에도 코를 골았다. 몇몇 사람들은 저 사람 내릴 생각이 없는가 보다 했다. 처음엔 그의 느닷없는 코골이에 대부분의 승객들이 상당히 짜증 난 것 같았지만 4시간 동안 한결 같이 엉망진창인 리듬으로 코를 고는 그의 꾸준함에 몇몇 승객들은 혀를 내두르며 대단하다고 탄복했다. 이륙 전 엄마의 품에서 칭얼대던 어린 아기도 그 남자가 코를 골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착륙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필리핀 시간으로 자정 즈음 마닐라에 도착했다. 원헬스 패스를 보여주고 세관까지 통과했다. 나는 필리핀 세관이 굉장히 무시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잔뜩 겁을 먹었는데, 생각처럼 나에게 리턴 티켓을 제시하라며 다그친다던지, 백신 접종 서류를 보여달라며 꼬투리를 잡는다던지 하는 일 따위 없이 너무도 친절하게 마닐라는 처음이냐며 즐거운 여행하라는 말까지 건네주었다. 필리핀 공항은 비행기 티켓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동생이 일러준 출구를 찾기 위해 총을 소지한 가드 중 한 명에게 길을 물었고 코바늘로 손수 만든 지퍼가 없는 가방을 최대한 여민채 사방을 경계하며 가드가 안내한 길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동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