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지 않으면 도대체 손이 심심해서 무엇을 하며 넷플릭스를 본단 말인가. 원래 난 넷플릭스를 보며 속눈썹 펌도 하고 유튜브 썸네일도 보고 강아지 눈곱을 별안간 떼주고 쇼핑도 해야 해서 성인 adhd를 스스로 의심했던 사람인데 뜨개를 하면서 넷플릭스 보며 뜨개'만' 하니 오히려 좋다.
초등학교 5학년, 당시 같이 뜨개 독학을 하기로 약속한 파워 e성향인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동네에 있던 아주머니들 사랑방과도 같던 뜨개방에서(나는 그곳에 들어가는 상상만 해도 긴장돼서 겨드랑이에 땀이 차올랐는데) 어린애가 뜨개를 다 하네-하는 아주머니들의 쏟아지는 관심에도 굴하지 않고 뜨개를 배워 내가 코 잡기 수준에 머물고 있을 때 홀로 목도리를 완성했고, 이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나는 뜨개 같이 구린 것은 다신 하지 않을 거라며 대바늘을 집어던졌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된 나는 어지간해서는 '다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후 2n번의 겨울을 맞았고, 당연히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다신 따위는 진즉에 철회한 나는 아직 두뇌가 팽팽 돌아 맥주를 마시면서도 무려 6가지의 각기 다른 꽈배기 패턴 니트를 떠냈던 몇 년 전의 겨울이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내 목도리 아니면 강아지 목도리 정도의 뜨개를 하며 겨울을 보내왔다. 굳이 겨울이라는 계절을 언급한 이유는 어쩐지 뜨개를 하고 있노라면 늘 그 계절이 겨울이었기에 그렇다. 그리고 이번 겨울, 굳이 꼽을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나는 뜨개에 돌아버렸다. 아니다, 아마도 10월 즈음부터 시작한 남자친구 목도리 뜨기부터였던 것 같다. 사귀고 처음 맞는 남자친구의 생일, 생일 선물이야 얼마든지 기성품을 구매해 건네줄 의향이 있었는데 살면서 한 번도 손수 뜬 목도리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남자친구의 말이 내 뜨개 욕구를 자극해 버렸다. 다음 날 바로 동대문 종합상가 내 털실나라에 남자친구를 데려가 원하는 실을 골라라 하고 목도리 뜨기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이 겨울은 뜨개에 미친 겨울이 되었다.
쉬는 날 뜨개질과 침대, 뭐가 더 필요할까?
시작은 버섯이었다.
작년에 모자를 뜨고 남은 모헤어 실로 제일 왼쪽 버섯(버킷햇)을 생산했다. 다음엔 남자친구 목도리를 뜨고 남은 실로 체크무늬 버섯을, 다음엔 부드러운 메리노울 실로 핑크 버섯을 만들었다.
바라클라바도 만들었다. 동생이 애기들 것 같다고 했지만 3n살의 내가 건장하게 쓰고 다닌다.
그러고 보니 저 하얀색 실은 담요를 뜨겠다며 동대문에 가서 무려 11 볼이나 사 왔던 건데, 동대문 뜨개상가의 대부분의 상인들은 스몰토크를 미국인처럼 즐겨하여 하얀색 실을 판매한 상인 역시 무엇을 뜰 것이냐 물어와 내가 담요를 뜰 것이라 하니 애기 꺼?라고 되물어 아니요 제 꺼~ 하자 그는 추가 답변 없이 주섬 주섬 11 볼을 봉지에 담아 건네주었고, 나는 그 실로 담요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일주일 만에 때려치우고 애기들 것 같이 보이는 모자를 만들었다.
꽃 모자. 너무 귀엽다. 너무 귀여운데 쓰고 동네 밖을 벗어나지는 못하겠다. 아예 해외여행을 가서 쓰면 모를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아닌데, 그냥 동네 밖에서는 못 쓰겠다. 그치만 참 귀엽다.
남은 실 처리하고자 뜬 가방.도안도 계획도 없이 멋대로 떴다. 강아지 산책 가방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
체크 버섯 생산 후 실이 남아 강아지 옷도 떴다. 커플로 장착하고 산책하면 기분이 참 좋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뜬 강아지 스카프. 귀여워서 친구네 강아지도 떠 줬다.
모티브를 연결하여 가방으로 만들었다. 여밈도 없이 허접하지만 그런 맛에 드는 가방이다. 이것도 강아지 산책 가방으로 자주 쓴다.
그리고 지금 뜨고 있는 모자. 마커링이 없는데 필요하다면 사지 말고 링귀걸이를 쓰자. 저 하얀색 실은 애기 담요 실이 아닌 베이비 알파카 실인데, 아주 부드럽고 따듯하여 몹시 만족하며 떴는데 거의 완성 단계인 지금, 갑자기 기온이 치솟았다. 다음 주는 다시 또 조금 추워지던데 그때 열심히 써야겠다.
뜨개를 왜 하냐고요? 그냥.
재밌으니까. 넷플릭스 프랑스 최후통첩을 보며 몇몇 개차반 같은 남성 출연자들 때문에 짜증이 솟구치다가도 내 손으로 완성하고 있는 귀여운 뜨개물을 보면 아휴 하고 한 시름 놓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