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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Dec 13. 2023

방콕에서 자주 망신살이 뻗친다

살면서 망신살이 뻗치는 순간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종종 그런 일이 나한테 생긴다. 간혹 복싱장에 등록한 첫날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집에 기어갔는데 새로 산 스포츠 브라를 탈의실에 두고 온 걸 깨달았지만 도저히 도로 찾으러 갈 기력이 없어 민망함을 무릅쓰고 복싱장에 전화해 관장님에게 제발 저의 스포츠 브라를 챙겨 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한다던지 하는 일들이랄까.


방콕에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좋기야 하겠지만. 순조롭지 않게 흘러갈 거라는 생각도 딱히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일들이 종종 생겼다. 나쁜 일들은 아니다. 그냥 태국인들로 하여금 저 한국인은 어디가 조금 모자란가 싶게 보였을 일들. 자꾸 내 자신이 뚝딱거린다고 느껴지는 일들이다.



푸르름 속의 크리스마스 트리




방콕에 도착한 첫날, 숙소 헬스장에 머신이 단 3개뿐인 것을 보고 이걸 어쩌나, 그냥 한 달간 근육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을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하체 하러 가는 날이면 딱 죽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라도 차마 한 달간 운동을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다음 날 바로 복합 쇼핑센터 내 위치한 헬스장에 등록하고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오픈이라는 소중한 정보를 얻은 뒤 또다시 다음 날 오전 8시에 헬스장에 갔는데, 내가 마주한 것은 오전 10시에 문을 연다는 문구가 적힌 굳게 닫힌 복합 쇼핑센터 입구였다. 분명 8시라고 했으니 어딘가 입구가 있겠지 싶어 여기저기 살폈으나 열린 입구는 없었다. 당혹스러워 헬스장에 전화를 해 보았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았다. 엄..으로 운을 뗀 뒤 미안한데 나 지금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어디로 들어갈 수 있을지 물었다. 직원은  차분히 주차장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주차장에 갔으나 열린 입구는 없었다. 이번엔 스타벅스 쪽으로 걸어가 보라고, 거기 메인 입구가 있는데 그쪽으로 일단 가보란다. 걸어갔다. 입구는 있었으나 열려있지 않았다. 직원은 이제 어떤 카페를 찾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못 찾겠다. 내 목소리에 점점 당혹감이 커져감에 따라 직원 목소리도 점점 차분함을 잃으며 본인은 지금 내부에서 내가 보인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마침 주변을 돌던 건물 경비 직원이 보였다. 결국 경비 직원에게 부탁해 헬스장에 도착한 지 15분은 지나서야 헬스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운동 전 유산소는 건너뛰었다.


헬스장에 한 달을 등록하자 내게 헬스장 종이 카드를 주었다. 이는 내가 한 달 멤버십을 등록했음을 증명하기만 할 뿐 헬스장 문을 여는 기능은 없다. 그래서 갈 때마다 유리문을 통해 종이 카드를 보여줘야 직원이 내부에서 문을 열어준다. 난 이게 상당히 불편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이 헬스장의 시스템은 이렇다. 한 달 이상 등록하는 회원만 문 여는 기능이 있는 카드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카운터에 주로 상주하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 그동안 몇 번 헬스장에 갔을 때마다 집에 갈 때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그날도 직원이 문을 열어주겠거니 했는데 중년 남자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가서 문 좀 열어달라고 영어로 부탁했다. 중년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번역기를 켜려고 하는 순간 중년 남자가 태국어로 뭐라뭐라 외치자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둘이나 카운터로 달려왔다. 둘은 미소를 지으며 뭐가 필요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컸기 때문에 시선이 카운터 쪽으로 어느 정도는 집중된 상태라 살짝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저 나가고 싶을 뿐이라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에게 다시금 문 좀 열어줄래? 하니까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냥 가서 열면 된다고 한다. 바로 옆에 버튼 보이지? 누르면 열려라고 한다. 과연 정말 코딱지만 한 버튼이 옆에 달려있었다. 왜 이렇게 작게 달아둔 거냐고. 졸지에 문도 혼자 못 여는 외국인이 된 것 같아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망치듯 헬스장을 나와버렸다.



방콕의 정신없는 야경



마지막으로 쓸 에피소드는 일이 지속된 순간은 위의 두 에피소드에 비해 대략 3초 정도로 현저히 짧은 편이지만, 민망함은 가히 내 인생 통틀어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숙소에 위치한 수영장이 나는 퍽 맘에 들어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고 있고 그날도 역시나 수영장에 가서 열심히 수영을 했다. 이번 방콕 살이에 총 3개의 비키니를 가져왔고 평소 끈으로 묶는 비키니는 예상치 못한 끈 풀림으로 인한 노출이 감행될 수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끈을 단단히 동여 맨 뒤에야 물에 들어가곤 했는데, 그때 입었던 비키니는 끈보다는 조금 더 견고한, 후크로 여미는 비키니였다. 항상 그렇듯 그날도 나는 열심히 자유형을 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수영을 하면서 유산소 효과까지 가져갈 수 있다니. 얼마나 환상적인지. 한 20분쯤 열심히 왔다 갔다 했을까.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물에 들어갈 요량으로 썬베드로 올라갔고, 미리 챙겨 온 비치타월로 대충 상체 쪽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진짜 갑자기 후크가 풀려버렸다. 풀릴 조짐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당연히 가슴 쪽을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후크가 풀려버렸고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약 3초간 공개적인 장소에서 상의 완전 탈의를 해버렸다. 후크가 풀리고, 잠시 누드비치 모멘트가 펼쳐지고 서둘러 상체를 닦던 타월로 가리는 데까지 총 3초 정도 소요된 것 같다. 수영장에는 썬베드에 남자 둘이 있었는데, 그들이 봤는지 어쨌는지까지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봤다면 뭐, 본 거고. 이미 지난 일 어쩔 거냐고. 일단 머리가 하얘진 나는 타월로 앞을 여미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가 다시 후크를 걸었다. 뭐 그땐 누가 있거나 말거나(다행히 없었지만) 이걸 먼저 잠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한 번의 시도로 잠글 수 있었고 그렇게 나는 그날은 다시 수영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독특했던 컨셉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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