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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Jan 21. 2023

6개월 만의 답장.

Dear. 엄마밥 먹고 배뚠뚠한 순천의 키노 작가님께.



2022년 7월 19일《왕겹벚꽃 연한 분홍》에 써주신 첫 편지글 잘 읽었어요 작가님. 수개월이 지나서야 2023년 1월 21일, 하루 내리 온전히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노트북을 열어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네요. 그동안 서운해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저 저의 글을 사랑해 주며 기다려주심에 감사드려요.


오늘은 2023년 첫 연휴이자, 그 첫날이랍니다. 4일간의 연휴 중 첫날을 온전히 쉼으로 보내고도 아직 3일이 남은 이 순간. 참 여유롭고 행복한 기분이에요. 가사가 없는 아주 잔잔한 음악을 켜두고, 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창가에는 인센스를 피우고, 따뜻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어요. 인센스 향이 옅게 8평 남짓의 이 작은 방에 은은하게 퍼지는 순간. 지금이 딱 오랜만에 작가님께 편지를 쓸 때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노트북을 열었어요. 


저는 블로그에 쓰는 일기 하나에도 늘 온 마음을 다해요. 그래서 가끔 피곤합니다. 좋아하는 일은 좀 러프하게, 대충 해도 되는데 말이에요. 작가님과 주고받는 편지들로 채우고자 발행하게 된 이 매거진도 사실 그런 기조에서 시작된 우리의 작은 소규모 프로젝트였는데, 또 마음은 뭔가 대단하게 느낌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지. 첫 편지를 받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글을 보내드리는 지금. 계속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아주 대단한 글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저의 답장을 받고 작가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작가님은 항상 제가 쓴 글을 전화로 낭독해 주시곤 하잖아요. 그렇게 낭독을 하며 "참 재미있다, 너무 잘 썼다"라고 칭찬해 주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 러프하게 썼던 글도 매번 다시 더 완벽하게 고쳐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오늘의 편지는 크게 고쳐쓸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정말 마음이 닿는 대로 쓰고 있는 편지글 이거든요. 그렇지만 이런 글도 어여삐 여겨 그 낭창한 목소리로 낭독해 주신다면, 편지글을 쓴 오늘 밤.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 정말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변하는 세상 속에서 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게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느꼈던 한 해가 바로 2022년이었어요. 세상에게, 그리고 계속 제 직장을 둘러싼 그분들에게 내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행동과, 데이터와, 이를 정리하고 증명하는 글 뿐이었으니. 저는 글을 쓰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하루 8시간을 넘게 모니터만 들여다보면서, 몰려오는 피로를 무시하고 매일매일을 억지로 활자를 읽고 해석하고 만들어내야 했으니 말이에요. 


2023년은 어떨까요? 다를까요? 아마 다르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 믿는 건, 그 경험들 속에서 분명히 제가 성장했을 것이라 믿는다는 거예요. 지인들은 가끔씩 저에게 "꼭 그렇게 까지 일을 해 야하냐, 그렇게 온 마음을 쏟아서 일을 해주어 봤자. 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적당히 하고, 너의 살길을 찾아라."라고 말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쏟아서 내 온 청춘을 바쳐 일했는데, 결국은 그들이 나 몰라라 하면 어쩌지. 그렇게 쓰일 만큼 쓰이고 버려지면 어쩌지. 저에게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어제의 고통으로 성장한 내일의 저를 믿고 조금 더 힘을 내고 즐기면서 일해 보려고 해요.


아마, 분명히 언젠가는 이 직장에서의 제 커리어도. 막을 내릴 날이 올 거예요. 그렇지만, 모든 걸 어수룩하게 다 망쳐버린 상황에서 끝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 정말 잘 되고, 인정받는 공간으로 꾸려서. 나보다 더 잘 꾸려나갈 좋은 후임에게 건네주고 박수 치며 떠나고 싶은 마음. 저는 이곳을 떠나더라도 그렇게 떠나고 싶어요. 도망쳐도 괜찮은 거 다 알고, 세상일이 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거 다 알지만. 박수칠때 떠난다는 그거 말이에요. 저는 그걸 한번 해보려고요.


물론 작가님 곁에서 만큼은, 예외입니다(훗) 

전, 오래도록 작가님 곁에서, 박수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올 수도 있겠죠, 아마 서로가 너무 미치도록 미운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그럴 때 여기,《왕겹벚꽃 연한 분홍》속의 글들이 꼭 우리를 붙잡아주길 바라요. 그러려면 많은 기억과 마음이 이곳에 담겨야겠죠? 그렇기에, 이번 해부터는 열심히 작가님께 편지를 보내볼생각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를 그리는 마음이, 늘 왕겹벚꽃 연한 분홍 빛깔이길 바라며, 오늘의 편지는 수줍게 이쯤에서 마무리 할게요. 곧 다시 만나요 :)




From. 연휴의 밤을 신나게 놀아볼 예정인 모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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