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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01. 2022

땀의 의미

피아노 배우기(10)

*이 글은 2018년 1월 쯤 <바이엘>을 배울 때의 이야기입니다.


땀 흘린 만큼 열매를 거둔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대단히 많다. 나는 이런 말들을 세상 좀 살았다는 사람들이 후세들을 자극하기 위해 사용하는 격언 류로 치부해 왔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난생 처음 해봤다.


오늘 나는 바이엘 하권 75번에 세 번째 도전했다.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지난 주 수요일의 일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참담한’ 이라는 단어를 중간에 하나쯤 넣어주는 게 좋겠다. 첫 도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지난 주 금요일, 두 번째로 다시 도전했다. 세상 격언처럼 첫 번째 실패는 나를 더 강하게 단련하지 않았다. 나는 실패의 기억 때문에 괜스레 위축되었을 뿐이다. 부족한 자신감은 연이은 실패를 불렀다. 


하지만 첫 번째 실패와 두 번째 실패는 질적으로 무언가 달랐다. 첫 번째가 참담한 혹은 한심한 실패였다면 두 번째는 못내 아쉬운 실패였다.


나는 세 번째 도전을 준비하며 많은 땀을 흘렸다.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제로 땀을 흘렸다. 중앙난방식인 내가 사는 아파트가 과하게 난방이 되기 때문이었다. 더운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서 반복해서 건반을 두드리자니 실제로 땀이 흘렀다. 내가 믿지 않는 또 다른 교훈 ‘1만 시간의 법칙’도 가끔 생각났다. 


아무튼 나는 내가 정한 ‘점검 연주 성공 방식’에 도달했다. 그 방식이란,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완주(完奏)하기를 세 번 연거푸 하는 것이다. 간신히 한번 성공하기도 어려운데, 세 번을 연거푸 성공한다... 이쯤 되면 선생님 앞에서도 틀리지 않고 연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75번도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터무니없는 자심감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이 선물한 정당한 자신감.


자신감은 또 다른 자신감을 낳고, 그 자신감은 또 다른 자신감을 낳고.

주말을 맞아 연습에 열을 올렸다. 76번도 실수 없이 세 번 완주를 했다. 내친걸음이었다. 77번에도 도전했다. 간신히 한번을 완주했으나, 자신감은 앞의 두 곡과 마찬가지였다. 무려 세 곡을 연습하는 동안 땀을 꽤 흘렸다. 더워서 흘린 땀인지, 열심히 하느라 흘린 땀인지 알 수 없지만. 연습을 끝낸 후 저녁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피아노 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딩동거렸다. 이쯤 되면 병증이 아닐까 할 정도로 한동안 내 머릿속과 눈앞에는 피아노 건반과 피아노치는 소리가 떠돌았다.


75번부터 테스트를 받는 날. 평소의 나와 달리 준비를 많이 했더니, 마음이 달라졌다. 레슨 받으러 가는 길이 즐거웠다.

바이엘 75번 악보. 지금 보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만, 연습할 당시에는 만만치 않았다.

청소년 문화센터 연습실 안의 피아노 앞. 마무리 연습이다. 바이엘 하권 책을 펼치고, 집게로 집은 다음 75번을 쳤다. 자신감있게, 하지만 부드럽게. 실수없이 잘 해냈다. 76번을 쳤다. 이번에는 곡의 성격에 맞춰 강한 터치로 건반을 두드렸다.(*써놓은 글을 교정하기 위해 읽어보니 ‘혼자서 잘 논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엘 연습하는 주제에 ‘곡의 성격에 맞춰 강한 터치로 건반을 두드렸다’니... 과대망상 같기도 하고, 자아도취 같기도 하다.) 두 손가락으로 동시에 건반을 짚는 부분은 이제 어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76번도 통과. 다음 77번. 아하. 세 곡을 연거푸 모두 성공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77번은 마무리 연습이 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컨디션이 아주 좋다고 느꼈다. 운동 선수들이 흔히 몸상태가 좋다느니, 컨디션이 좋다느니 할 때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실력이 거기서 거기지’했는데, 아마도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조금 늦게 나타났다. 쇠는 달궈졌을 때 쳐야하는데, 식을까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연습도 많이 하고, 컨디션도 좋지만 막상 점검 연주를 하려니까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다. 특히나 세 곡을 연타로 해내겠다는 욕심이 긴장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75번 곡.

완벽하지는 못했다. 중간에 아주 살짝 ‘삑사리’가 났다. 선생님이 눈치 못 챘을 리는 물론 없다. 하지만 피겨 스케이팅으로 치자면 엉덩방아는 아니다. 회전 후 착지 때 살짝, 아주 살짝 비틀한 정도. ‘좋으세요’라는 평가를 받았다. 좋으세요 라는 단어의 우리말 어법 문제점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76번 곡 도전. 

아, 그런데 5, 6번 마디에서 그만... 다시 해보겠다고 했다. 보통 때는 이렇게 다시 해봤자 완전히 엉겨서 망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실수 하나없이 끝까지 연주했다. 75번을 해낸 자신감 덕이었다. 연습할 때 75번 보다 쉽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바이엘 76번 곡과 77번 곡

이어 77번. 

중간에 조금 실수가 있었다. 만약 이 곡까지 완벽하게 해냈다면 내 스스로 많이 놀랐을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나 하고. 그렇게 갑자기 바뀌면 안 좋다는데. 다행히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레슨에서 한 곡도 통과하지 못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무려 세 곡을 통과했다. 통과의 비결은 내가 잘 안다. 땀 때문인 것 같다. ‘땀 때문이다’라고 하지 않고, ‘땀 때문인 것 같다’고 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집이 덥고, 피아노가 있는 내 방이 덥기 때문이다. 아무튼 땀 때문에 통과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땀의 가치와 의미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내 방법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허, 만시지탄이다. 그래도 사람이 어디 쉽게 바뀌겠는가. 나는 그저 나 하던 대로 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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