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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Nov 14. 2022

본질, 그리고 그 밖의 것들

내가 아는 시계 이야기(2)

광장을 내려다보던 성당의 큰 시계가 사람들의 손목으로 내려온 것은 언제쯤일까. 백과사전 류를 검색해 보았다. 15세기 말 쯤인 모양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의 연산군 무렵이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세계사를 떠올린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무렵이다. 왜 이쪽이 더 감이 잘 올까. 연산군이든 콜럼버스든 5백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들 가운데 수명이 5백년을 넘는 물건들이 얼마나 될까. 가전제품 가운데 카세트 플레이어, 비디오 플레이어, CD, LD는 거의 사라졌다. LP 플레이어는 사라지는 듯 하다가 회고조 취향에 기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물건들이 5백년 후에 존속할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데스크탑 컴퓨터-글쎄. 선풍기-글쎄. 자동차-갸우뚱. 스마트폰-글쎄. 손목시계-다시 5백년 후에도 있을 거다. 안경-존속 가능. TV-갸우뚱. 이렇게 따져보면 손목시계의 힘은 대단한 셈이다. 


이미지 출처(대문 사진 포함) : pixabay 


1997년 나는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곳에 가보았다. 그때 여행한 도시 중에 스위스의 루체른이 있었다. 루체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와 죽어가는 사자 상(빈사의 사자상)으로 관광객들에게는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루체른에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도심 한복판의 광장을 빙 둘러싼 건물들의 1층 진열장에는 빠짐없이 손목시계가 있었다. 내가 아는 롤렉스와 오메가도 물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회면을 장식한 사건들에 등장했던 피아제와 파텍 필립 등의 초고가 시계들도 있었다. 그 밖에 난생 처음 듣고 보는 시계들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 진열된 시계 가격을 우리 돈으로 환산해보고 어이가 없었다. 나에게는 현실성이 1도 없었다.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보았던 몇 천 만원짜리 시계도 기함할 일이었는데, 그곳에는 억이 넘는 시계가 여러 종류였다. 무려 25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IMF’가 터지기 몇 달 전이었다.


가이드를 해주던 동생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런 시계는 누가 사는 거냐. “나도 잘 모르지만, 연예인이나 유명 운동선수들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책상물림 동생에게서 나올 만한 답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TV 스포츠 중계에서 특이한 장면을 보았다. 경기를 끝낸 테니스 선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차는 것이었다. 테니스 코트 곳곳에 시계가 있으니 시간을 알고 싶은 것은 아닐 텐데. 그 후 여자 프로골프 선수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경기를 끝낸 그 선수의 첫 마디가 “엄마, 내 시계”였다. 한국계 선수였다. 엄마는 시계를 건넸고, 그 선수는 손목에 시계를 찼다. TV로 중계를 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그 시계를 보았다. 


지난 해, 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의 시계가 화제가 되었다. 나달은 경기 내내 시계를 차고 시합을 했다. 얼마 전 은퇴를 한 나달의 경쟁자 로저 페더러가 40세 넘도록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재료공학의 발전으로 라켓의 무게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라켓 무게 10g 차이에도 반응한다는 프로 테니스 세계에서 3~4시간 계속되는 시합동안 손목시계를 찬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세계 최정상의 라파엘 나달이 그런 일을 했다. 그 시계는 무게가 거의 안 나간다고 하던가. 더더더 놀라운 것은 시계의 가격이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12~13억원 정도라고 했다. 루체른 쇼 케이스에 있는 시계 몇 개를 합친 가격이었다.


이 정도 되면 시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라떼’라는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물건 아니던가. 그렇다. 시계의 본질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밖에 디자인이든 가격이든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이다. 그것은 시계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13억원의 가격으로 어떤 운동선수의 손목을 감싸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다. 



시계의 본질을 이렇게 잘 아는 나는 중학교 때부터 손목시계를 찼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다. 그런데 한동안 손목시계를 오른쪽 손목에 찼었다. 시계의 용두(龍頭*)로 인해 피부에 트러블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른손에 시계를 차면 용두가 손목 쪽을 향하니까 손등에 닿지 않았다. 피부 트러블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30년도 넘게 왼손에 차던 시계를 오른손에 차려니까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맞는 시계를 발견했다. 라파엘 나달의 시계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가볍고 용두가 잘 안 보일 정도로 조그만 시계를 찾았다. 가격이 불과 10만원 대 초반이었다. 그 시계의 브랜드도 나의 작은(?) 허영심을 자극했다. 망설이지 않고 샀다. 지금 차는 시계도 그 시계와 같은 계열이다. 세 번째로 같은 브랜드 시계를 사는 동안 가격이 조금 오르기는 했다. 

내 시계. 오른쪽에 있는 용두가 보일락말락할 만큼 작다. 사진으로 보니 시계가 낡아 보인다.ㅜㅜ


이게 두 번째 시계 이야기의 전부냐고 생각할 사람들에게, 끝으로 질문 한 가지. 내가 손목시계를 왼쪽 손목에 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크게 두 가지로 말 할 수 있다. 하나, 나는 오른손잡이다. 둘, 앞의 답보다 훨씬 중요하다. 시간을 알고 싶어서다. 그렇다. 나에게 시계는 이렇게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다. 


*용두 : 손목시계에 조그맣게 튀어나와 있는 돌기. 옛날 시계들에서는 태엽을 감는 기능을 했다. 지금은 시간을 조정하는 기능 정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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