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쇄를 찍자!(重版出来)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 드라마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 짓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했다. 몇 년을 준비한 시험에서, 당연히 합격할 거라 믿었던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애써 담담한척하며 나 자신에게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보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 드라마가 보내는 위로에 나는 매회 그저 하염없이 울고 말았다.
동명 만화가 원작인 <중쇄를 찍자> 는 원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정평이난 노기 아키코(野木 亜紀子) 작가가 각색하고 일드 좀 봤다고 하면 익숙한 베테랑 감독인 도이 노부히로(土井 裕泰)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그들은 이번 드라마 외에도 <도망치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언내츄럴>, <죄의 목소리>를 함께한 명콤비다. 이 콤비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또한 히로인인 구로사와 코코로는 구로키 하루(黒木 華)가 분했다. 연기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으며 이와이 슌지 감독이 문학적 향기가 난다고 호평한 배우가 출판사 편집자로서의 연기를 펼쳐낸다. 작감배가 완벽한 작품이니 이제 나는 믿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구로사와 코코로는 어렸을 때부터 유도 외길만 걸어왔으나 부상으로 인해 다시는 도장 위에 설수 없게된 인물이다. 유도를 접고 그녀는 흥도관 출판사에 취업하게되고 만년 2위 <<주간 앰퍼러>>의 신입 편집자로서 고군분투하며 성장해나간다. 이 이야기를 듣고 ‘뭐야? 주인공이 성장해서 결국은 만년 2위를 1위로 만드는 뻔한 스토리에 감동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당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좌절을 맛본다. 일단 배경이 되는 주간 앰퍼러조차 만년 2위만 하는 잡지. 우리의 주인공 구로사와 코코로 역시 평생 올림픽 무대를 꿈꿨지만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만했고 앰퍼러 담당 영업사원인 고이즈미는 적성에 맞지않는 코믹영업부에서 벗어나고자 부서 이동을 원하지만 번번이 거절 당한다. 앰퍼러의 와다 편집장 또한 이 전 잡지를 폐간한 쓰라린 기억이 있고 이오키베 부편집장은 자신이 담당한 만화가를 경쟁사에 보내줬어야 했던 통한의 순간도 있었다.
그렇다면 만화가들이라고 과연 평탄할까? 노장 만화가는 인터넷에서 ‘오와콘(オワコン, 한물간 콘텐츠)’이라며 사이버 불링을 당해 절필을 결심하고, 한때 코믹만화에 거장이라 불리던 만화가는 알콜중독으로 인한 손떨림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거장들이 이런데 젊은 만화가들은 오죽이나 더 하겠는가. 데뷔조차 못해 꿈을 접는 이도 있고 데뷔를 하더라도 어느 하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모두들 안간힘을 쓴다.
단순히 그들이 좌절하는 모습에 ‘이것 봐. 나만 힘든 게 아니네. 사람들 다 힘든데 그만 징징거려야지’라며 내 처지를 위로했다거나 불행 포르노를 즐겼다 결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좌절했지만 모두 다시 일어섰다. 방황은 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구로사와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표류하는 마음 또한 혼자가 아니었다. 그 마음을 붙잡아줄 누군가가 반드시 있던 것이다. 좌절을 맛본 자가 또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는다. 그들의 이러한 구원의 연쇄작용은 새로운 희망을 낳아간다.
중쇄를 찍자의 원제인 중판출래(重版出来)는 출판업계의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말이다. 과연 그들은 중쇄를 찍으며 행복해졌을까? 적어도 이 드라마를 보는 당신은 행복해질것이다. 걸어온 날들 속에서 한 번이라도 좌절을 해봤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