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근차근 May 14. 2022

네 발, 두 발, 세 발

우리 모두 교통약자로 태어난다

초등학생 때는 수학여행, 수련회를 가면 꼭 마지막 날, 반 대항전으로 난센스 퀴즈를 풀고 춤을 추며 뜨거운 응원의 밤을 보냈다. 그때 풀었던 난센스 퀴즈 중 2N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와! 하고 감탄하는 퀴즈가 있다. 바로, 아래의 질문이다.



"아침에는 네발, 점심에는 두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은?"



이 말을 내려 적는 지금 이 순간,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가슴 중앙에는 형언 못 할 감정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는다. 과자를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야! 정답은 사람이야!!" 하고, 까르르 웃어버렸던 어린 시절과 지금은 질문을 수용하는 마음의 무게가 다르다. 비행을 시작하고, 하루에 600명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또 보냈다. 그러면서 나는 마치 한 편의 공연처럼, 어린아이로 시작해 청년을 걸쳐 노인 손님이 되는 '사람'의 연대기를 비행기에서 몇 번이고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엔가, 비행 중 20년 전의 우리 엄마를 떠올린 적이 있다. 3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손님이 비행 내내 칭얼거리며 울었던 날이다. 보호자와 함께 아이를 달래 보았지만 효과는 영 없었다. 몇몇 손님의 한숨 소리에 아이 어머니는 눈치를 보다 결국, 아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른 손님이 없는 어두운 갤리에서 보호자와 함께 아이를 재우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시끄러운 엔진 소리는 아이에겐 마치 도깨비 소굴처럼 느껴졌는지,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보호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우리를 찾아왔다.



"70년 인생을 산 우리도 비행기는 탈 때마다 무서워요. 이 아이는 어떻겠어요. 우리도 손자가 있어서 마음이 참 짠하네. 애기 엄마, 주눅 들지 말아요. 애기 엄마 잘못이 아니야."



 노부부의 말과 동시에 나는 20년 전, 우리 엄마와 택시가 생각났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엄마도 나를 데리고 택시를 탔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했고, 목청이 터지게 울어재꼈다. 엄마는 어린 나를 달래고 또 달랬지만, 울음을 멈추지 않던 나 때문에 택시 기사는 화를 냈다. 엄마는 결국 눈치를 보며 택시에서 내려야 했고, 나는 답답한 차에서 탈출했던 게 마냥 좋았다. 엄마 등에 업혀 걷던 나는 유난히 들썩이던 그녀의 등을 마주댄 볼로 느끼며, 까무룩 잠들었다.


 내가 기내에서 마주했던 엄마와 아이손님이 곧 과거의 젊은 엄마와 어렸던 나였다. 우리 엄마에게도 오늘의 노부부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엄마 등이 그때 보다 덜 들썩였으려나? 그런 생각에 나는 객실 화장실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 이후로는 버스에서, 전철에서, 비행기에서 만나는 세상 모든 어린 엄마들이 꼭 20년 전의 우리 엄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노부부처럼.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또 어느 날은 회사의 모 본부 본부장이 연세가 지긋한 그의 부모의 손을 꼭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신입사원인 내 눈엔 한 없이 무섭고, 근엄 있어 보였던 중년의 본부장이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상하게 설명을 했고, 나중엔 손을 맞잡고 어머니의 느릿한 발걸음에 맞춰 비행기를 천천히 내렸다. 20대 초반, 할머니와 프랑스 여행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본부장과는 정반대였다.
 

할머니가 빨리 걷지 못해 뒤에 줄이 길게 늘어서면,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 할머니를 재촉했다. "할머니 빨리 와!"라고 재촉질 했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 비행을 하면서 후회를 그렇게 많이 했었다. 두 달 전, 할머니와 제주여행을 다녀왔다. 5년 전 프랑스 여행을 했을 때보다 더 느려진 할머니의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이번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내 발걸음을 늦췄다.  



"살면서 한번씩 교통약자가 되는 시기가 순차적으로 오는 게 삶인 것 같아. 결국, 우리 모두 교통약자로 태어나서 교통약자로 나이가 드니까"



 언젠가 나의 승무원 동기가 이런 말을 했다. 그녀의 말이 딱 맞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네발에서 두발, 그리고 세발이 된다. 다만, 우리가 두 발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린 시절을 잊는다. 또, 세발이 되었을 때를 생각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비행은 나에게 이런 삶의 이치를 알려 주었다.



 어린아이, 젊은 엄마, 본부장, 할머니. 결국 모두 '나'였거나 나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는 아이가 옆에 있더라도, 걸음이 느린 누군가로 인해 나의 걸음이 늦어질지라도, 그들과 함께 발걸음을 맞춰 걸어 나아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