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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Nov 24. 2022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이 모였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불현 듯 머리와 마음을 채우는 순간이 좋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많은 이유들로 무뎌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샘솟듯 한다. 세월에 덮인 얼굴 너머로 보이는 어렸던 천진스런 얼굴들이 반갑다. 지나간 시간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냉소적 감정을 키우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움의 흔적이 남긴 것은 생각보다 항상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면 그렇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옛날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일이지만 각자의 기억은 제각각이다. 내가 기억하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같은 추억에 대해서 다른 기억을 하고 있는 경우는 흔하다. 같은 사실을 두고 진실공방을 벌이는 말싸움은 친구들 간에 이루어지는 흔한 해프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택적 기억을 가만히 살펴보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도 보이는 것이고 지독히 기억하고싶지 않은 기억일수록 선명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신에게 엄했던 선생님에 대한 분노나 자신을 괴롭힌 친구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오랜 친구와의 대화가 담담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에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는 끄덕임이 있는 마음의 대화이다.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갖는 모임이다. 80여명이 졸업하고서 연락이 닿는 50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였다. 친구들 2/3가 서울에 살고 있어서 돌아가신 선생님을 모시고 서울모임을 가졌던 것도 6-7년은 된 것 같다. 학창시절 꽤나 멀리 흩어져 있어 스쿨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였던 친구들이 이제는 전국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것도 우리 학교만이 갖는 특이한 경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흔하던 우열의식이 근본적으로 우리에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시절 선생님의 역량과 가치관, 그리고 특별했던 학교방침도 한 몫을 한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생님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이제는 선생님들이 돌아가신 빈자리를 수용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혼자가 되어 가시는 부모님들의 건강이 공통의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서 안부를 묻는 말에 살가움이 깃든 것은 남자친구들보다 역시나 여자 친구들이 한결같다. 쑥스러움이 가득해서 말 몇 마디 나누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반가움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들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에도 우열 같은 것들이 존재했고 그로인한 상처를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은 것도 나의 특성이고 보면 다른 기억을 고집하는 친구의 억지도 받아줄만 하다. 이제는 어린 상처들도 모두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주었고 자연스러움에 녹아내는 지혜가 되고 있다. 먼저 세상을 달리한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적어졌다는 분명한 순간에 서서 친구들을 바라본다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도 알게 한다.


 12년 전에 총동문회를 만들며 우리회기 동창회도 함께 만들었다. 학교동문회란 것들이 당연한 사회 현상 중에 하나인 측면도 있다. 한번쯤 모든 것을 비틀어보게 되는 나의 성향으로는 그 필요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그 가치가 커진다고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 가치가 흐려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그것은 감성으로 풍부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그리움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들과 결국 혼자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과 진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문이란 것도 그러한 의미의 확장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들 중에는 다른 이와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있다. 나의 경우는 극단적일 정도로 이러한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애써 만든 외로움의 감상적 상태의 기억을 제외하면 삶 속에서 외로움의 감정에 빠진 경험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인 상황에서도 익숙해질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주위의 평판을 의식하지 않게 된 것도 오래전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혼자만의 생활에 특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고 오랜 인연에 반가움을 갖는 감성도 아직까지는 풍부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이러한 양면성이 존재함에도 그 선택은 항상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성향은 혼자이기를 고집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창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에게 입은 심각한 마음의 상처도 세월 속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나의 인생 속에 그러한 상처가 없었음도 하나의 행운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 나의 의지가 있었고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유연한 감정의 통제도 작용한 것이었다. 인간의 삶 속에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는 순간들은 모두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서 기인한다. 환경에 의한 것이나 병리적 상태에 기인된 것이라는 불가항력적 상황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이 또한 스스로의 훈련에 의해 단련되는 것이고 유연한 마음의 결과이다. 흔히 강한 사람을 세상은 요구하고 있지만 그 본질의 핵심은 유연함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연함의 비결은 관용의 실천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그리고 친구가 잘되면 시기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간혹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이를 스스로에게 변명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정말 인간은 못된 것이다. 나의 경우 이러한 인간의 함정에서 자유롭다고 자신하지만 ‘과연 그럴까?’하고 다시 자문한다면 분명히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 행동의 결과가 되지 않기 위해 하는 인간의 노력은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인간의 시기심이 인간다움으로 승화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삶의 역설을 보여주는 삶의 단편들이다.


 인간이 혼자일 수 없는 이유는 관계를 통해 증명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부모 역시 자신들의 의지로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인간의 탄생은 기적처럼 다가온 것이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갖게 되고 형제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일가친척들과의 혈연관계를 갖게 된다. 더불어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구성원이 된다. 참 많은 사람과의 관계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에 대해 반동으로 혼자를 고집하는 경우가 나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정도의 문제이고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경우일지라도 인간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결코 관계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은 결혼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남녀의 관계도 이러한 보편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 환상적 경험이 인생의 가치를 빛나게 하는 것들임에는 틀림없다. 삶에 있어 이러한 삶의 경험은 인간의 감성의 크기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으며 자신의 신념과 약속이 어디까지 진심일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경험도 지속성을 갖기 힘든 것이 인간임을 알게 되지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갖는 가치의 의미도 동시에 알게 한다. 더욱이 남녀의 사랑과 결혼이 특별한 관계의 형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보다 유연한 인생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린시절 친구를 만나듯 내가 접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사람 사이에 갈등을 만드는 이유에는 지나친 자기주장이 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모습도 주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모습도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도 인간의 육체적 한계성을 극복하는 정도의 문제이고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요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성인 ADHD는 충동적 성향이 두드러지므로 계획성이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회생활이 어렵다. 이로 인해 사회성이 결여된 것을 개인적인 성향 혹은 의지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그 증상으로 긴 글을 읽을 때 다른 생각으로 인하여 집중하기 어려운 경우나 물건을 보관해둔 곳이 잘 생각이 안 나고 정리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그리고 단순 반복 업무를 하다가도 계속 다른 일이 신경 쓰이는 경우 등이다. 심지어 음주나 흡연 등 충동을 자제하기 어려운 경우와 게임이나 도박 등에 몰두하여 꼭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이성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거나 충동구매에 약한 경우, 휴식이 방해될 정도로 잡생각이 많은 사람도 이 증상을 의심하게 된다. 증상이 확인되면 약물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으면 주의력 결핍, 충동적인 행동 등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병증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여전히 관계에 대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 것이다. 결국 인간관계의 모든 것은 따뜻한 심성을 갖는 것이고 이에 대한 노력이 스스로를 실망시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인간의 모든 삶은 자신을 속일 것이다. 그럼에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의 시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비틀어보는 것도 삶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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