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첫걸음

by 조영의

퇴직을 앞 둔 남편은 올해부터 농사를 짓겠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어서 놀랄 일은 아니지만 농사지을 땅이 우리에게는 없다. 생각을 들어보니 몇 년 전부터 계획하였고 종중(宗中)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밭도 저렴하게 임대할 수 있고 퇴직 후 할 일이 생겨서 나쁘지는 않은데 무엇을 심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가끔은 뜬금없는 이유로 싸우기도 하고 풍작의 농작물을 수확하는 상상으로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이 점점 많아지는 나를 보란 듯 남편은 농사지을 밭둑에 농막을 설치했다. 눈도 녹지 않은 이른 봄날이었다. 지출을 아끼려고 누군가 사용하다 방치한 것을 수리하여 써볼까 싶어 가져왔다는데 사용하지 않은 시간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창틀은 외풍을 막기 위해 사용한 방풍 테이프가 듬성듬성 뜯긴 채 검게 변했다. 단열 창문 뽁뽁이는 떨어질 듯 살짝 걸쳐있고 건드리면 검은 창틀 먼지까지 날아올 것 같아 불편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매서운 겨울바람 외풍의 한기가 느껴진다.

얇은 유리창은 안을 그대로 보여준다. 커튼 걸이로 사용했던 나사못은 녹슬어 흉물스럽게 돌출되었다. 잘못하여 스치면 다칠 수도 있어 신경 쓰인다. 그뿐인가. 천장에서 물이 샌 흔적이 벽을 타고 내려와 바닥은 검은 무늬가 생겼다. 몇 가지만 수리하면 된다는 남편 말을 믿은 것이 속상하여 볼멘소리는 폭풍 잔소리가 되었고 언성이 높아지면서 싸움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애절한 사랑의 결실을 위해 도피하다가, 불의에 맞서 싸우다 지친 몸을 은신하는 장소로 폐가가 나온다. 어둡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겪는 밤은 두렵지만, 은폐된 공간에서 하룻밤 휴식은 달콤하다. 마치 드라마 세트의 폐가 같은 농막은, 창밖 풍경을 환하게 볼 수 있어 위로가 된다.

넓은 창만큼 하늘이 그대로 들어오고 농촌의 자연이 품 안으로 안긴다. 잡힐 듯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몇 그루 소나무도 자연스럽게 멋진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네를 매어도 좋을 것 같은 나무 하나는 볼수록 끌린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마음을 깨우고 흙냄새도 날아오는 것 같다.

뒤쪽 창으로는 농사지을 땅이 보인다. 시부모님이 땅을 개간하여 담배 농사를 지었던 밭이기도 하다. 그 땅에서 지은 담배 농사로 공부한 남편은 땅의 면적은 알지만, 노동으로 흘리는 땀의 고통을 모른다. 농사에 관심도 없고 무지한 것은 부모님의 간곡한 염원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 힘든 농사를 짓지 말라며 어릴 때 도시로 유학 보내고, 농기구도 만지지 못하게 했으며 밭과 논에는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60이 넘어 정년이 다가오자 뜻을 어기고 내 땅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흙이 목숨이던 부모님은 흙으로 돌아가신 후라 말씀이 없다. 살던 집도 무너져 밭이 되었다. 몸 누울 자리는 임대한 밭 가장자리 6평 농막이 전부지만 고향 냄새가 있어 좋다고 남편은 말한다. 인간에게 고향은 고된 삶의 휴식처이고 마음의 종착지라는 생각이다.

내일을 생각 없이 행복한 남편 곁에서 나도 나만의 생각에 잠긴다. 농막 주변 길가에 꽃길을 만들 생각이다. 봄꽃은 꽃을 사다 심어 꽃부터 보고 풀을 뽑아 정리하여 씨를 뿌릴 것이다. 동트는 여름 아침 나팔꽃을 먼저 보리라. 손톱에 물들일 봉숭아도 심고 기분 좋은 접시꽃도 심어야지. 코스모스꽃이 핀 가을도 상상한다. 해바라기도 심을 생각이다. 과꽃은 어디에 심을까, 마른풀을 헤집어 보며 땅의 기운을 느껴본다.

밭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나란히 서 있지만, 남편 시선은 곡식 씨 뿌릴 땅에 머물고, 나는 꽃씨 뿌리고 싶은 땅을 찾고 있다. 농사짓기 첫걸음, 교과서에서도 없는 수업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