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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4.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26. 비바람 속에 순례자

                 (제24일 차 /  폰세바돈~폰페라다)


♧ 오늘의 코스


 오늘(10.19)의 코스는 해발 1500m 고지에서 폰세바돈(Foncebadon)을 출발하여  ▷ 라 크루즈 데 히에로(La Cruz de Jierro) ▷ 만하린(Manjarin) ▷ 해발 1,515m 푼토 봉(Punto Alto)을 지나 ▷ 아세보(Acebo) ▷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 ▷ 몰리나 세카(Molinaseca) ▷ 해발 600m의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27.4km를 7시간 동안, 4만 2천 보를 걸었다.      

   


♧ 장대비를 맞으며  


폰세바돈으로부터 내리막을 길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세찬 비바람과 싸우느라고 고생 꽤나 했다. 거센 비바람은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며 지나갔고 또 다른 비바람이 우리의 비옷을 벗기려고 용을 쓴다. 이국에서 온 우리에게 겁을 주며 괴롭혔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판초 우의를 걸치고 등산 모자를 착용했지만 비바람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머리에는 빗물이 흘러 안경 렌즈가 성애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을 벗어버리니까, 만물이 희미하게나마 소생된 느낌이다. 바지는 벌써 젖어서 무거워졌다. 


뜻밖에도 판초우의는 차가운 비바람을 막아주는 방한복으로 기능을 바꾸었다. 하지만 등산화에도 빗물이 새어 들어와 양말 속에서 대피해 있던 발을 적신 지 한참 되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끈을 꿰는 구멍으로 물을 뻐걱뻐걱 토해 낸다. 


높은 산에 꼭대기에 살고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은 비바람을 피하느라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재들은 그래서 작은 키로 산 중턱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내리막길이 자갈밭이라 미끄러워서 나무 막대기를 구해서 지팡이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순례길을 24일 동안 걷는 동안 스틱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하산 길에 파인 물웅덩이에 몇 번이나 빠지며 울다가 웃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재로 한 ‘The Way’에서 조난을 당하는 주인공의 아들을 생각났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고생을 사서 하다니 도대체 어처구니가 없다. 비바람 때문에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 찍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사진을 찍는 의지는 버리지 않았다. 아뿔싸, 약간의 비탈진 길에서 바위 위에 미끄러져 찔레꽃과 산딸기 숲에 내 몸이 뒹굴고 말았다. 


때문에 판초우의는 찢어졌고, 몸에는 가시에 긁힌 자국이 무수하여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쓰리기 시작한다. 다행스럽게도 사지는 멀쩡해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 철제 십자가에게 소원을 빌다.


 라 쿠르즈 데 히에로(La Cruz de Jierro)에 도착했다. 크루스 데 페로는 스페인의 레온(Léon) 지방에 위치한 몬테 이레고스(Monte Irago) 산 정상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관습은 고대 켈트인들의 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켈트인들은 여행을 떠날 때 자신들의 무거운 짐과 걱정을 돌에 담아 특정한 장소에 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돌을 가져와 크루스 데 페로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죄와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행위는 또한 성 야고보에게 자신의 기도를 바치고, 순례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전통을 따르며 크루스 데 페로에 돌을 놓고 간다. 이 돌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기도를 담고 있으며, 철탑 주위에 쌓인 돌들은 그동안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자취를 증명하는 상징이다. 


  순례자들은 저마다 고향이나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며 기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놓고 간 돌멩이와 매단 헝겊이나 리본, 스티커에 소원이나 다짐, 기도문이나 메시지들이 쓰여 있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풍진세상을 견디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우리네 성황당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는 조약돌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어 허전했다. 이빨이라도 빼서 탑 아래에 놓고 안녕을 빌어야 하는가? 염치없지만 무사고를 빈다. 남이 놓고 간 조약돌 중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가 쓰인 돌을 골라 좋은 위치로 옮겨 놓으며 소원을 빌기로 했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 고, 나도 아내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고 있는데 함부로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철제 십자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모습은 하나같다.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카메라 렌즈를 향하는 꽤 진지한 모습들. 


비바람 때문에 남에게 사진을 부탁할 염치가 없어서 우리 부부는 교대로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 길을 재촉하기 전에 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에 5m 길이의 철 십자가,  산꼭대기에 전봇대처럼 꾸밈없이 삐쭉 솟아 오른 철제 십자가! 보면 볼수록 매력도 재미도 없게 생겨먹었다.    

  

♧ 폰페라다의 템플기사단 요새


순례자 가이드북을 보면 몰리나 세가의 풍경이 너무 아기자기하단다. 산티아고 순례길 800km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입을 모은다. 소박한 마을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카페에는 비바람을 피하는 순례자들이 젖은 옷을 짜서 순간이나마 말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앉을자리가 없었다. 


가이드북에서 소개한 이곳의 명주도 마시고 싶었지만 술을 마시고 비 내리는 산을 내려갈 수 없어서 통과하고 어렵사리 차를 주문하고 마시는데 꽤 긴 시간이 날아갔다. 비바람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름답다는 경치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여기 알베르게에 투숙하고 싶어 방을 찾아 염탐했지만 만원이라서 폰페라다까지 7.9km를 더 걸어가야 했다. 내려가는 동안 비가 그쳐서 하늘이 멀쩡하게 맑아졌기 때문에 폰페라다의 템플기사단 요새에 들렸다. 이 요새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1282년에 지어졌다. 

템플기사단의 요새

마침 수요일이라서 입장료를 면제받았다. 대신에 시내의 알베르게에 침대가 없어서 비싼 호텔에 투숙해야 했다. 비싼 가격이지만 오늘 하루 고생한 우리 부부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텔의 건조기를 이용해서 빨래들을 쉽게 말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본전을 뽑았다 치자. 


아쉬운 것은 낮에 찍은 사진이 통째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비바람 때문에 휴대폰을 닫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발생한 사건인 것 같다. 아내가 찍은 사진으로 오늘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례를 시작한 지 24일 만에 가장 힘들었던 하루로 기억하고 싶다. 


♣ 종교와 전쟁은 궁합이 안 맞아 


이베리아 북부지방은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80년간 전쟁을 해서 기독교 세력이 지배했다. 종교와 전쟁은 양립될 수 없는 개념으로  문제는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전쟁의 본질은 증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가 다른 나라들 간에 전쟁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벌써부터 종교 전쟁에 대한 이론을 적립하면서 종교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첫째, 전쟁은 방어적 목적이나 신앙의 보호 등, 정당한 이유((Just Cause)가 있어야 한다. 둘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합법적인 권위((Legitimate Authority)를 가진 자, 즉 국가나 교회와 같은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해 치러져야 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정의롭고 선한 의도(Right Intention)로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전쟁의 결과로 기대되는 이익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비례(Proportionality) 해야 하며, 불필요한 폭력이나 고통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기준들을 통해 전쟁의 정당성을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평화와 사랑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본질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 종교 및 가톨릭에 대한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질문: 1,2,3 


   앞의 제25장의 “♧ 순례길에서 생각나는 은사님”에서 언급한 대로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께서 천주교 교단에 제출하였었다. 이를 받은 천주 교단에서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이 회장 서거 후 24년이 지난 2011년 11월에야 차동엽 신부가 이에 대한 답변을 써서 중앙일보 지상에 발표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김안제 교수가 이로부 터 다시 5년이 지난 2016년 5월에 개인적 견해를 자기 자서전인 『안제백서』에 게재하였다. 


  가톨릭 입문을 앞둔 필자는 차동엽 신부님과 나의 은사이신 김안제 교수님의 의견을 참고로 하여 나 나름의 종교 및 가톨릭에 대한 교리지식을 여기에 정리하였다.  


질문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고 차동엽 신부는 이 질문에 대하여 직설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한다.  공기나 소리는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다. 개미는 코끼리의 존재를 다 알지 못한다. 흑백 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김안제교수는 신의 존재도 부존재도 증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간의 감각으로 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나타나 자기 모습을 보여 줄 때만 가낭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철학적, 신학적, 경험적 접근이 결합된 복잡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신학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들은 다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우주론적 논증 (Cosmological Argument)은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어야 하며, 이 연쇄의 첫 번째 원인은 하느님이라고 주장한다(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


  둘째. 목적론적 논증 (Teleological Argument)은 우주의 정교한 설계와 질서가 지적 설계자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지적 설계론’의 입장). 


  셋째, 존재론적 논증 (Ontological Argument)은 하느님의 존재를 개념적으로 분석하여, 하느님의 존재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안셀무스가 대표).


  넷째 도덕적 논증 (Moral Argument)은 인간의 도덕적 직관과 절대적 도덕 법칙이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대표).


  다섯째 경험적 논증 (Experiential Argument)은 종교적 경험이나 기적, 성서 등의 종교 경전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하느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똑똑히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신다.  강제적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믿음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영역에 속한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 될 수 있다. 많은 종교에서 인간의 삶은 시험의 과정으로 간주된다. 하느님의 명확한 존재가 드러난다면, 그 시험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결국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제는 개인의 신앙, 철학적 성찰,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각 개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자신의 믿음을 가지게 된다.


질문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


 차동엽 신부는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에서 '말씀'은 '존재 원리'를 말한다고 하며 그것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이다. 만나면 증명되는 것이다. 만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누가 만들었겠는가?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에서 신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체험이 자신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에 김안제교수는 우주 생성의 창조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의 규정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수용의 진리라고 본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 주장하고 잇는 자연발생설이 설득력이 크다고 한다. 태초에 신이 빅뱅을 일으켜 우주를 창조하였고, 그 이후 오늘까지 점차 진화되었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제는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는 복잡한 주제라서 증명 방식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접근 방식도 1번 질문의 질문에서 열거한 5가지 논증법(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 경험적 논증)을 적용한다. 이 외에도 개인의 종교적 경험이나 신앙의 증거, 성서 등의 종교 경전을 통한 신의 계시를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들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며, 반드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않을 수 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많은 경우 신앙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철학적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질문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 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차동엽 신부는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오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고 표현했다는 거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에 포함된 개념이다.  김안제교수는 우주만물은 신에  의한 창조 이후 계속 진화돼 왔다는 진화적 창조론( Evolutionary Genesis)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인간과 생물의 진화와 신의 창조를 둘러싼 논의는 오래전부터 과학적 관점에서는 ‘진화론’을, 종교적 관점에서는 ‘창조론’으로 대립되고 있다. 이 두 입장은 과학은 '어떻게(how)'에 집중하고, 종교는 '왜(why)'에 집중한다.


    진화론은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제안한 이론으로,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 종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다양해진다고 설명한다. 자연선택은 환경에 적응한 개체들이 생존하고 번식하여 유전적 특성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과정이다. 화석 기록, 유전학, 분자 생물학 등의 다양한 증거들이 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현상이다.


    한편, 창조론은 신이 우주와 생명을 직접 창조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많은 종교 전통에서는 신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성경의 창세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조론자들은 주로 성경이나 다른 종교 경전에 근거하여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주장한다. 즉, 신이 진화 과정을 통해 생물을 창조하고 지시했다고 믿는 관점이다. 프란시스 콜린스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적 진화론과 신앙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접근법은 신이 진화의 법칙을 설계하여 이를 통해 생명을 창조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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