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일 차 / 오 페드로우소~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오늘(10.28) 코스는 오 페드로우소(0 Pedrouzo)를 출발하여 ▷ 아메날(Amenal) ▷ 라바코야(Lavacolla) ▷ 몬테 델 고소(Monte del Gozo)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20.5km를 4시간 30분 동안 3만 8 천보를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의 마지막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하지만 도착하기까지 오르막길이 나타나면서 걷기가 쉽지는 않았다. 포장도로로 상당 구간이 오르막길로 몬테 델 고소까지 이어져 힘이 들었다.
오늘이 33일 순례길 행진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부터 출발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도중에 비가 뿌려서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이 순례길 사물들은 모두가 의연한 것 같다. 소말양도 그렇고 마을의 집들도 그렇고, 산천초목도 모두 모두 의연한데 나만 조급하기 짝이 없다. 세찬 비가 갑자기 쏟아져 급하게 비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비를 맞으면서도 일제히 기립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들의 꼭대기를 보기 전에 먹구름이 먼저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큰 키다. 내가 세상에서 본 나무 중에서 키가 가장 클 것으로 생각했던 메타세쿼이아 보다 더 클 것 같다. 하늘로 향한 나무 머리끝을 보려면 고개를 완전히 꺾어야 했다.
이 나무는 호주가 원산지라는데, 현재 가장 큰 키의 유칼립투스는 태즈메이니아라는 곳에 있는 90.7m이고, 역사상 가장 큰 키는 101m였다고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은 유칼립투스 나무 잎으로 오일을 만들고, 목재는 건축재로, 수액은 해충제로 쓰인다.
몬테로고소에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바람이 하도 거세게 불어서 날아갈 것 같았다. 기쁨의 언덕에 서 있는 산티아고 동상 앞에서 감동한다. 비바람을 헤치며 모자를 쓰고 전진하는 산티아고 동상이 너무 불쌍하다. 지칠 대로 지친 순례자, 목적지가 저기라는 환희를 몸에 숨긴 조각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로마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조각상도 둘러본다.
저 멀리 안갯속으로 보이는 세 개의 첨탑이 오늘의 목적지이자 지난 33일간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란다. 첨탑들이 고개를 쑥 내밀고 나에게 손을 높이 흔들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누군가 이 언덕에 제주의 돌하르방이 서게 된다고 말한다.
제주 올레길 어딘가에도 산티아고 순례길 상징인 가리비 조개표지가 설치된다고 한다. 올레길에서 가리비 표지를 만나면 지금 한 달간의 고통과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밤을 새울 것 같다. 올레길 개척자인 S 여사가 우리 연수원에서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본격적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초입에 진입하면서 도로가 넓어지고 숲은 건물로 바뀌었다. 자동차로 옆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마지막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이 상당히 복잡하지만 표지판이나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보다는 조가비 마크를 배낭에 매달고 앞서 가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 걷기로 했다. 속 편한 편한 무임승차다.
비가 많이 내려 옷을 적신다. 비옷으로 가리지 못한 아랫도리는 반 이상이나 젖었지만 33일의 대장정이 끝나는 영광의 날이므로 대수냐 싶다. 참고 견디기로 한다. 시내 중심가에 들어갈 때까지 장대비가 계속 내렸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유럽전역에 있는 각자의 집 앞에서부터 걸어서 순례길을 여행해야만 했다. 수백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갈리시아의 가리비 껍데기를 몸에 달고 성인들의 은혜를 입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오늘날, 9개의 순례길이 콤포스텔라 산티아고의 무덤에서 만난다. 가리비 조개껍질의 내부 홈이 결국 끝부분에서 합쳐지게 되는 것은 모두 다른 길들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석유 회사인 극동 쉘은 가리비의 마크를 사용하고 있는 대신 매년 일정액의 기금을 순례길 정비에 보태고 있다.
이제 매년 거의 백만여 명에 달하는 21세기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많은 숙소와 식당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다. 순례자의 숫자는 점점 더 증가해서 2019년에는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의 숫자만 어림잡아 한해 30만 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이 길이 2년간 폐쇄되었다가, 2022년 다시 개방되자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순례자들이 몰려와서 그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찾아왔던 보물을 찾자 백파이프의 연주를 들으며 오부라도이로 광장에 도착했다.
앞에는 산티아고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자신 만만하게 우뚝 서있다. 대성당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랐다. 순례자들이 속속 도착하며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울컥 눈물이 쏟아지면서 정호승의 시 ‘연어’가 생각난다.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 웃음을 터트리며 밤을 밝히리라
연어는 바다를 떠났고 나도 인천바다를 떠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왔다. 드골공항에서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생장피드 포르에 도착해서 순례를 시작한 지 35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르고스와 레온에서 이틀씩 머무르고 33일 동안 내내 걸어왔다. 한 달 이상을 앞서거니 서거니 했던 길동무들을 거기서 한꺼번에 만났다.
검게 탄 낯익은 얼굴들 중에 보고 싶은 얼굴이 몇몇이 뵈지 않는다. 처음부터 같이 걸었던 사람 중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통계상으로 생장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한 순례자자는 15% 정도라고 하니 85%는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이별한 것이다. 그들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려나?
비는 멎었지만 나는 비옷을 걸친 채로 광장 땅바닥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피곤함을 잊고 성취감과 흥분으로 가슴이 떨린다. 멀고 먼 길을 속절없이 걸어온 나에게 무한히 감사하며 눈물을 흘린다. 지금까지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여기저기서 단체 순례자들과 학생들이 응원가를 부르며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다. 서로 간에 완주를 기념하며 수고했다고 덕담을 품앗이하면서.
나는 그동안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로만 알고 있었다. 미국에 샌디에이고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순례길 지식을 휴대폰에게 물었다. 순례길의 수호자인 산티아고는 나라별로 다르게 부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야곱, 야고보, 제이콥, 제이콥스, 자크, 제이크, 제임스 등으로 호칭하고 있어서 낯설기 짝이 없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며 12 사도 요한의 형이다. 그는 제베대오(세배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동생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다가 같은 직업의 다른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부 지역을 오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는데 기원 후 산티아고가 스페인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자마자 헤롯왕에게 붙잡혀 예수의 12제자 중에서 최초로 순교하였다. 제자들이 산티아고의 시신을 탈취하여 대리석 석관에 넣어, 작은 배에 석관을 싣고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시켰다.
그러던 중 배가 침몰되어 석관이 부서져 시신이 바다에 떠다니게 되었는데 가리비 조개껍질이 시신을 보전되면서 스페인 해안가로 밀려와 이를 발견한 제자들이 시신을 땅에 묻었다고 전한다. 이를 기념하여 가리비 조개껍질을 순례자들이 배낭에 매달고 다니기 시작하여 순례길의 패스포트요, 기념품이나 액세서리처럼 패용하고 다닌다.
19세기에 들어 “펠리요”라는 양치기가 빛나는 별을 따라서 들판으로 향했다. ‘콤포스텔라’란 “들판 위에 별“이라는 뜻이란다. 한 주교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과 성체가 산티아고의 것으로 추정해서 예루살렘과 로마의 신도들에게 알렸다.
알폰소 2세가 성 산티아고를 이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고, 이 자리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신자들은 성 산티아고의 고행을 추억하며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을 유럽 전역에 만들기 시작했다.
그 순례길을 완주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지은 죄를 사면해 주었기 때문에 참여자들이 많아졌다. 이들이 걷다가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기도 했기 때문에 대피소(알베르게) 같은 숙소를 짓고, 템플기사단을 조직하여 순례자들을 보호했다.
이곳을 여러 번 찾은 H교수는 자기가 왔을 때마다 오래된 대성당을 보강 공사를 했는데 이번만은 공사하는 현장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오래된 성당치고는 산뜻한 느낌을 안겨주고 있다. 처음으로 대성당을 방문한 나는 우연하게 행운을 누린 셈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가운데에 있는 영광의 문(Portico de la Gloria)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오른쪽 문에는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왼쪽 문에는 구약성경의 인물들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두 개의 문 중앙기둥에는 산티아고가 차지하고 있고 그 위에는 그리스도가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과 천사들이,
상단부 팀파눔 아치에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24명의 원로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영광의 문을 들어서면 산티아고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순례자들이 손으로 만지거나 입을 맞추며 지나갔다.
그 까닥 에 대리석이 닳고 달아서 약간 패어 있다. 대성당의 주제단의 가장 상층부에는 말을 탄 산티아고의 조각상이 보이고 제대 중앙에는 순례자 복장의 산티아고의 반신상이 보인다.
여느 순례자처럼 제대 뒤로 가서 반신상을 껴안으며 알현하고 그 아래 산티아고 유해를 모신 성해함이 있다. 우리는 비좁은 지하 경당으로 내려가 산티아고를 경배했다.
낮 12시에 대성당에서 "보타 푸마이로"(Bota Fumeiro)라고 하는 특별한 향로미사가 거행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지켜보았다. 향로미사 쇼는 숯과 향료가 들어 있는 40Kg의 향로를 밧줄에 매달아 8명의 사제들이 밧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를 반복하자 좌우로 원추운동을 했다.
성당 내 커다란 오르간이 성가가 연주되어 향로미사의 분위기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65m의 아치를 그리며 최대 82도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거대한 향로가 지상으로부터 21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면서 연기가 품어 나오면서 숯불이 향을 태우자 그 향내음이 성당 내부에 퍼지게 하였다.
향로미사는 순례자들의 땀 냄새와 몸이나 배낭에 붙어 온 해충을 없애고 순례자들의 건강과 평안을 비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향로미사는 화려한 대성당에서 엄숙하게 진행되면서 간간히 수녀님의 아름답고 청아한 성가가 경건한 성당 안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사 중에 한국의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기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향로미사는 순례의 완성을 축하하는 이벤트 같았다.
순례자 완주 증명서는 대성당 앞에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나 헬레미스 궁전(현재는 호텔로 사용)을 지나 백여 미터 정도 걸어내려 가면 왼쪽 편에 순례자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오쯤에는 도착한 순례자들이 많아 오래 기다린다는 정보에 따라 향로미사를 마치고 완주 증명서를 받으러 갔더니 기다리는 순례자가 두세 명뿐이라 너무 한산하여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점심을 뒤로 미루고 사무실을 찾아온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에 있는 컴퓨터에 몇 가지 묻는 대로 입력하고 번호표를 뽑고 3, 4분쯤 기다렸더니 번호가 전광판에 떴다.
33일 동안 수많은 세요(스탬프)가 찍힌 여권(크레덴시알)을 직원한테 건네자 15초의 감식(?)과 질문을 거친 후 ‘순례자 완주 증명서’가 나왔다. 해독할 수 없는 언어(스페인어가 아니라 라틴어란다)로 표현되어 있었지만 중간 부분에는 내 이름과 하단에는 출발지인 생장 피드 포르트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022.9.24.부터 10.27. 까지 779km를 완주했다는 사실은 감으로 터득했다. 발급 수수료 3€와 보관하는 통 2€를 합해 5€를 지불하자 완주 증명서가 내 손으로 들어왔다. 증명서를 보관하는 통은 초등학교 때 졸업장 케이스를 닮았다. 그 증명서는 지난 33일간의 개근상장 같은 느낌을 주지만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완주증을 받았다고 누가 나에게 특권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은 죄를 공식적으로 사면시켜 주는 것도 아니다. 누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산티아고가 나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주는 격려증명서 같았다.
하지만 생장 피드 포트에서 출발한 사람의 15%만이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한다는 통계가 있고 보면 자부심이 생겨 행복하다. 35일 동안 한 번도 택시나 버스를 타지 않았고, 코스를 건너뛰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 뿌듯하다.
가톨릭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성인의 축일(7.25)에 맞추어 걸으면 지은 죄 전부를 사면해 주고 다른 때 걸으면 반을 사면해 주었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지은 죄의 반을 용서받았으니 다시 한번 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나이로 봐서 나중에 다시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현재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프랑스길보다 길고 좀 험하다는 824km의 스페인 북부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