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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Aug 11. 2022

조증 삽화일 때의 나에 대해서.

금요일 날 대학병원에 간다는 이유로 조울증 약을 먹지 않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아이는 이를 갈면서 쿨쿨 잠에 빠졌고, 나는 비오는 이 밤에 아이스카페라테를 마신다.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뿐이라 나는 또 책상에 앉았다. 어젯밤 나는 내가 모텔 창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또 잠시 뒤에는 내가 사는 이 도시에 라이브클럽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내가 아는, 돈 좀 있는 아저씨들에게 투자를 받으면 되겠지, 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조증을 앓고 있다는 게 글에서 확연히 드러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글의 완급을 조절하는 힘을 잃어버린 것 같다. 전 남편과 전 남친을 잠시 생각하다가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딸의 돌잔치 영상을 보면서 울었다. 오늘 하루 종일 내 기분과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오전 아홉 시에 버거킹에서 새우버거와 오징어링과 콘샐러드와 코울슬로를 시켰고, 오전 열두 시에는 초코칩 스콘 두 개와 아이스카페라테를 시켰다. 오후 일곱 시에는 파스타와 새우튀김을 시켰다. 제대로 먹은 건 새우버거와 스콘, 아이스라테뿐이다. 그외에는 전부 버렸다.


갑자기 나는 소설 공모전을 찾아본다. 마치 당선이라도 될 것처럼 말이다. 음, 어떤 것은 이 달 말일까지군. 어떤 것은 지났군, 하면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금방 지겨워져서 리디북스에서 만화를 결제하고 1화를 보았다. 그것마저 지겨워진 나는 오아시스를 들었다. 그러다 발작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전 남친의 차를 찾으러 갔다. 익숙한 번호,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돌아서는데 샌들의 끈이 툭 하고 떨어졌다. 발을 절뚝이며 나는 집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왔다.


글을 메타포적으로 쓰기 싫다. 휙휙 내뱉고 싶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날 것 그대로 적어두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언어가 곧장 와해되어 버리기 쉽다. 나는 이 메타포적인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붙잡고 있다. 내 불행을 어딘가에 빗대고, 나의 비루함을 무언가로 장식하지 않으면, 나는 너무 초라해져 버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리랜서의, 수입이 불안정한, 이혼인의, 조울증을 앓고 있는, 이제 막 남친과 헤어진, 조증 삽화가 와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내 자신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태연한 척해야 한다. 글에서만큼은. 아무리 일상 속에서 나동그라져 있다고 해도. 글에서만큼은.


우리 앞 동의 빌라 1층에는 무당이 산다. 나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 집 베란다에서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를 본다. 무섬증을 느낀다. 그 무당은, 자기 앞 동 빌라에 사는 여자의 무시무시한 불행을 읽어낼 만큼 신력이 뛰어날 것 같다. 나는 섬뜩해져서 얼른 담배를 끄고 안으로 들어온다. 왠지 그 무당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집 베란다를 바라보고만 있을 것 같다. 추워져서 에어컨을 끈다.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나를 데워줄 글을. 나를 포장해 줄 글을. 나를 일으켜세워 줄 글을 말이다.


41.00kg. 내 몸무게. 나를 지탱하고 있는 내 몸무게의 숫자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다가 내려왔다. 살 찌는 데는 떡볶이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떡볶이집이 하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곳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일은 엄마가 재워놓은 LA갈비를 점심으로 꼭 구워 먹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이 키에 40kg은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먹어야 한다. 글을 쓸 힘으로 먹어야 하는데, 나는 곪아 비틀어진 배를 움켜쥐고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어쩌나, 글은 나를 이토록이나 배부르게 하는데.


어제는 문득 소설 소재가 하나 떠올랐다. 사실을 조금 비틀어 써 볼까 생각 중이다. 솔직히 말하면 전 남친 이야기다. 그 사람과 나와 있었던 일을 과장과 허구 조금 섞어 만들어 볼까 한다. 재밌을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 분노의 화염을 집중적으로 퍼부어야지. 내 외로움과 슬픔을 자작하게 깔아놓아야지. 필력이야 어찌되었든 완결 하나 내 보아야지, 한다. 그러고는 이게 만약 출간이 된다면 전 남친이 볼 수도 있겠지, 자기 이야기인 걸 바로 알아채겠지, 하는 망상에 조소를 지어 본다. 내 필력으로 출간은 엄두도 못 내지만, 망상은 자유다.


나는 너무 커다랗다. 나는 너무 조그맣다. 나는 모든 것을 관성으로 느낀다. 나는 모든 것을 급작스럽게 새로이 느낀다.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 동동 평온한 거리감 유지에 매번 실패하고 만다. 나는 흡연부스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번호를 물어보고, 길거리를 지나가던 단발의 여성이 내 절친이 될 거라고 믿어버린다. 그 순간에는 조증의 영향력하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행동한다. 나는 남자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저너머에 앉아 있는 다른 남자에게 번호를 물어볼까 눈을 희번득인다.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을 갈구한다. 연결됨을 갈구한다. 내가 똑따로 떨어진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거부한다.


그래, 멀리서 보면 어차피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이 지구에 기생하는 존재들일 뿐인. 그래도 나는 인간에 기대어 산다. 내 딸에 기대어 산다. 부모님에게 기대어 산다. 한때는 전 남편에게 기대어 살았고, 전 남친에게 기대어 살았다. 거리를 걸어갈 때 마주하게 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에 기대어 산다. 나홀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이젠 모르겠다. 위대한 고독, 나는 모른다, 그딴 거. 나는 그냥 외로울 뿐이다. 괴로울 뿐이다. 슬플 뿐이다. 놀이공원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나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길을 잃고 누군가의 손길을 다급하게 기다리고 있다. 손에 걸리는 게 썩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입맞출 것이다.


여름 햇볕에 검게 그을린 내 두 손을 본다. 기름기에 절어 차분해진 내 긴 머리카락을 본다. 말라서 볼품없는 배와 엉덩이를 본다. 하도 담배를 피워 대서 푸석해진 내 얼굴 피부를 본다. 나의 꼬락서니를 찬찬히 본다. 이 꼬락서니를 거무룩한 눈으로 지켜봤을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이모들을 포함한 네 자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데도, 이제는 가장 나이가 들어보이게 확연히 늙어버린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우리 아빠를 생각한다. 혼자 조울증에 관련된 책을 정독하고 나에게 조용히 추천을 해주시던 우리 아빠를 생각한다. 그들의 육신 사이에서, 그들의 영혼을 지닌 채 나는 태어났다. 이 몸과 영혼으로 나는 여태껏 살아왔다.


이 몸과 영혼을 나는 사랑해 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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