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고는 못 살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쓴다. 일상이 무거워서 내려놓기 위해 쓴다. 딸을 기다리면서 쓴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면서 쓴다. 고독하기 위해 쓴다. 살아내기 위해 쓴다. 어젯밤에 자기 전에 혼잣말로 '지겨워'를 반복했다. 다 지겨웠다. 인간관계가 특히. 다들 날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버림받은 것 같았다. 음식물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작은 봉지처럼 느껴졌다, 내 몸이. 갑자기 나는 작고 초라해졌다. 사람의 기분에는 왜 항상성이 별로 없는 걸까. 좀 같은 형태로 쭉 이어져 나가면 뭐가 덧나나. 기분은 시시각각 변하고 감정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흐르고, 나이는 먹어 간다. 내 글이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 또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어? 하고 느낄 때가. 하지만 쓰는 걸 멈출 수는 없다. 그래야 좀 살 것 같으니까. 그래야 숨 좀 틔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쓴다.
뱀처럼 혀를 낼름거리는 내 병, 조울증, 일상은 빡빡함. 촉새처럼 떠들어대는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묵묵히 입을 닫고 있다. 딸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다. 간호조무사 실습과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치고 취업을 해서 경력을 쌓은 다음 이사를 가야 하는데, 몇 년 뒤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이 작은 도시에 엉덩이를 눌러붙이고 편한 대로 또 살아갈지도. 꿈은 한순간에 일그러지고 망가진다. 그렇다고 패배자 마인드로 살기는 싫다. 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항상 내 안에서 찾아내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사람을 나는 정말 싫어한다. 좋아하는 것에 광적이고, 싫어하는 것은 분명한, 그런 분별있는 사람이 좋다. 몇 주 전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는데 디자이너분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계신 걸 보고 반가웠다. 난 아는체를 하면서 그 책 재밌죠, 이렇게 말했다. 순간 영혼없이 내 머리를 만지던 그분의 눈빛이 바뀌는 걸 목격했다. 사람은 그렇다. 공통점을 발견한 순간, 어느 일정 부분 너와 내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흐름이 바뀐다. 난 그 순간이 좋다. 어렵게 비꼬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냥 한마디로 하자면 나랑 결이 맞는 사람들과 더 소통해 보고 싶다는 뜻이다.
점점 더 문장은 더디 나오고, 말을 고르게 된다. 그래, 자주 쓰지 않으면 글과 나는 어색해지는 것이다. 내 감정, 내 느낌을 표현하는 데 제약이 생기고, 나 자신을 낯설게 느끼고, 누구보다도 맞닿아 있어야 할 내 스스로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걸 느낀다. 어제 친구와 드라이브를 갔는데,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살면서 내가 왜 태어난 건지 의문을 가진 적이 별로 없어. 그리고 태어난 걸 절망스럽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진짜 그랬다. 친구는 최근 신경쇠약으로 많이 힘들어하다가 겨우겨우 헤쳐나와 일상을 살고 있었는데, 본인은 태어난 데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었다고 들었다. 세상에 던져진 나에 대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끊임없이 묻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일은 끔찍하다. 태어난 데는 이유가 없고, 일단 태어났으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태어남 자체가 고통이란 걸 받아들이고 말이다. 이유는 묻지 말되, 생즉고라는 사실은 묵묵히 받들어야 살아갈 수가 있을 것 같다. 내 고독의 문법은 글쓰기이고, 내 고독은 한없이 다채롭다. 다채롭게 날 괴롭힌다. 그래서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라오스로 여행을 떠나셔서 집이 며칠 비게 되었다. 집 안에서 담배를 실컷 피우는 중이다. 밀린 빨래를 하고, 커피를 시켜 마시고,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딸이 오는데 정말 기대된다. 내 사랑을 마음껏 퍼부어 주어야지, 하고 난 각오한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딸이 날 반기는 그 기분은 마치 천국같다. 딸의 입으로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면 난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그 애가 웃는 모습을 보면 내 입꼬리는 느슨히 풀린다. 여름날 푸릇푸릇한 새순이 이슬을 맞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잠시라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 애를 보는 게 내 낙이다. 간호조무사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치른 뒤에 나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마도 스페인 지브롤터로. 딸과 함께 가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아쉽게도 조금 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가서 마음껏 보고 느끼고 즐기고 오련다. 어렸을 적 낡은 티비에서 <로켓 지브롤터 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은 어린 소년이 죽은 할아버지의 시체를 바다에 띄우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나는 쭉 지브롤터로 가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꿈을 이룰 때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 삶은 이렇다 저렇다 쭉 늘어놓기 위해서 쓴다. 보고싶고 그리워서 쓴다. 무성한 푸른 잎들이, 잠들지 않던 여름들이 그리워서 쓴다. 내 젊음이 그리워서 쓴다. 우습게도 낡은 몸뚱어리만 남아 영혼은 활활 불타오르는 게 꼴같잖아서 쓴다. 비루해서 쓴다. 역겨워서 쓴다. 내 삶의 별은 내 딸. 내 삶의 원동력은 알 수 없는 그 관성. 살아가야만 한다는 그 관성. 빌어먹을 관성.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 관성. 이제는 무감각해진 그 관성.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쓴다. 기억하기 위해 쓴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윽 찾아온 오늘이라는 날에, 나는 새삼스러워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쓴다. 이 새 아침을 생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쓴다. 사실 무섭고 두렵다. 새 아침이, 어두운 밤이, 느즈막히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하지만 견뎌낸다. 뭘 위해 견뎌내는 건지 확실하지도 않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난 무감각해지고 싶지 않다. 살아 있고 싶다. 아직도 무지갯빛 비를 꿈꾼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사람. 쉽게 행복에 빠지고 쉽게 슬퍼지는 사람.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글을 쓰는 사람. 본인을 쉽사리 처연해지게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 비참함에 뒹굴어도 금방 일어서는 사람. 난 그렇다.
내 가슴속 횃불을 들고 일어나자. 이럴 때일수록 용기를 내자. 그래, 그래야지.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라면 응당 그래야지, 암. 내가 보려하지 않았던 내 시궁창 같은 면모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야지. 지켜봐야지. 이제 갓 마흔이 된, 이 여자가, 딸을 지극히 보고 싶어하는 이 여자가, 세상 살이 이제 혼자 하려면 그래야지. 조그만 것에도 기뻐할 줄 알고, 다정함을 잃지 않을 것. 지중해의 햇살과 시원한 바닷물을 그리며, 그렇게 소소한 꿈을 꾸며 살아가야지. 비록 조증과 공황발작이 언제 날 덮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제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난 또 횃불을 들어야지. 눈 번쩍 떠야지. 엄마가 라오스의 어느 강물 사진을 보내왔다. 그곳에서 천천히 유영하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느긋해진다. 곤히 자는 개 한 마리가 담겨 있는 사진도. 오늘은 춥지만 볕이 좋다. 약속은 없고 빨래는 돌아가고 커피와 담배는 책상 위에 놓여 있고. 내일부턴 또다시 출근. 다시 시작. 한숨 쉬어가는 이 주말에 나는 또 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올 딸을 간절히 기다리며. 널 기다리며.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