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멀리서 보니 고추가 다 익어보인거지. 가까이서 보면 아직 퍼런 데가 있어서 따면 안 됐지.”
1월 말부터 시작된 고추 농사가 지난한 시간을 지나 8월 초 첫 고추를 수확하게 하였다. 고추 농사는 1월 말 비닐하우스에 고추모판이 들어설 자리에 전기선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추씨를 모판에 심는 2월 중순 강원도의 밤은 아직 영하이기 때문에 전기선이 고추씨가 심긴 모판에 따뜻한 열기를 전해주지 않으면 고추씨가 발아도 되지 않고 얼어버린다. 바닥에 전기장판만 깔아주는 게 아니다. 밤에 고추모 위에 모포를 덮어주었다가 낮에 햇살이 좋으면 모포를 벗겨주고 저녁에 다시 닫아 주어야 한다. 고추씨를 모판에 심고 나면 엄마는 고추를 밭에 내어심기까지 하룻밤 주무시고 오시는 장거리 외출을 못하신다. 고추를 돌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란 고추 모종은 한 달쯤 크다 3월 초쯤 되면 조금 더 큰 모판으로 옮겨심기를 해야 한다. 처음엔 아기 손톱만 하던 고추 모종이 두 달쯤 지나면 어른 손바닥만큼 자란다. 자라면서 생김새가 변하는 모종들도 있지만 고추 모종은 발아를 하고 자라는 모습이 크게 변하가 없이 키만 훌쩍 큰다. 그런 고추모종은 초등학교 다닐 때 알던 동창을 고등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만났는 데 키만 훌쩍 크고 얼굴은 초등학교 때 그대로여서 낯설지 않고 반가운 마음과 비슷하다.
밭에 고추를 내어 심는 일은 엄마의 한 해 농사 중 가장 큰 일 중 하나이다. 고추모종을 밭으로 옮기고 잡초 방지와 고추의 성장을 위해 미리 씌어둔 검정 비닐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고추모를 넣고 물을 주고 흙을 덮는 과정을 혼자 하기는 버겁다. 어버이날 무렵 사 남매가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가서 고추를 심어 드리기도 한다. 나름 역할이 있는 데 고추에 비닐을 뚫고 물을 주는 일은 농사 경력이 가장 우수한 오빠가 주로 하고 나는 언니와 고추 모종에 흙을 덮어준다. 평소 안 하던 노동을 하다 보면 '에구에구, 낑낑' 소리는 기본이고, 쪼그린 자세에서 시작했는데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모종삽으로 흙을 푼다.
고추 모종을 밭에 옮겨 심었다고 끝이 아니다. 고추가 어느 정도 자라면 고추가 쓰러지지 않게 줄도 쳐주어야 하고 아래쪽 잎을 떼줘서 고추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고추가 열리면 찾아오는 병충해에 적당히 농약도 쳐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확할 고추가 없다. 고추 전염병은 몇 그루에 생기면 금방 고추밭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런 일들은 주로 엄마가 혼자 하신다.
고추를 기르면서 가장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고추 따기.
어려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농사로 경제를 가르치셨다. 꼭 필요한 교통비나 교재값 외 용돈은 농사일을 통해 벌게 하셨다. 사 남매 중 농사가 가장 서툰 건 나였다. 어렸을 때 골골거리던 나는 고추밭에 들어가면 10분도 안 돼서 끙끙거렸다. 햇볕에 어지러워 주저앉기도 일쑤였다. 그래서 농사에서 열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친구랑 핫도그도 사 먹고 어묵도 사 먹었던 기억이 있는 데 이는 무슨 조화일까?
농사에 열외였던 내가 농사를 배운 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농사를 짓던 시댁에 가면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른 아침 고추밭에서 고추를 땄다. 종종거리는 어머니가 안스러운 마음과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해인가 혼자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엄마께 전화해서 미안함을 표현했다.
“엄마, 내가 지금 하는 농사일 십 분의 일이라도 친정에서 했으면 저를 업고 다녔을 텐데요.”
친정에 가서 고추 따는 실력을 보이고 싶은 데 엄마는 명절을 앞두거나 우리가 엄마집에 간다고 하면 고추를 미리 따신다. 와서 편히 쉬고 가라는 뜻이다.
엄마가 딴 고추는 이쁘게 목욕을 하고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비닐하우스로 다시 돌아간다. 거기 엄마가 파란 방수포를 준비해 두셨다. 고추는 파란 방수포요에 검정 포장막을 덮고 뜨거운 햇볕에 바짝 말라갈 것이다.
오래전에는 사 남매 먹거리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해 고춧가루를 빻아서 팔기도 하셨다. 아파트 전단지 광고로 엄마 고춧가루를 팔아드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해마다 엄마의 고추 농사는 줄고 있다. 언제까지 엄마의 고춧가루를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춧가루 주실 때 넙죽 받아오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한 번 더 표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