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리뷰
스크린 속 주인공이 나에게 말을 건다면? 우디앨런 감독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이런 상상을 영화로 풀어낸 영화이다.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영화라는 특별한 공간을 찾는다. 영화는 때론 환상과 허구로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하지만 위안을 주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1985년 개봉한 이 영화는 1985 영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각본상 수상작이며 우디 앨런 감독의 독특한 유머와 깊이 있는 서사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전쟁 후 찾아온 대공황에 남편은 실업자가 되었고 세실리아는 밖에 나가 일을 하지만 돈을 모으기 쉽지 않다. 가정폭력에 외도까지 저지르는 남편과의 삶은 너무나도 버겁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낙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극장을 찾아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관람하던 중 영화 속 주인공인 톰이 세실리아에게 말을 건다. 그러곤 스크린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혼란스러운 영화관을 뒤로 한채, 두 사람은 현실 세계를 누비기 시작하는데..
세실리아는 남편의 외도와 더불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인 극장에서 <카이로의 붉은 장미>라는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하여 감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매번 남편을 떠나갈 결심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장면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힘든 현실을 겪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이상을 꿈꾸고 감상에 젖게 된다. 영화 속의 멋진 사람들, 그리고 근사하고 낭만적인 대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다섯 번째 영화를 보던 중 영화 속 모험가인 톰 백스터가 세실리아에게 말을 걸고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던 세실리아는 백스터와의 만남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남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영화 속 이야기나 다름없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사치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와의 만남이 한편으로는 걱정됐다. 그러던 중, 세실리아의 앞에 영화에서 톰 벡스터를 연기한 배우 길 셰퍼드가 나타난다. 영화에서 도망친 톰 벡스터로 인해 자신의 배우 인생까지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던 그가 직접 톰을 잡으러 왔던 것이다. 처음엔 톰 벡스터인 줄 알았던 세실리아는 그가 진짜 길 셰퍼드라는 것을 알아채고, 작품과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배우로서의 자신을 알아봐 주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길 셰퍼드도 호감을 보이면서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서로 함께 하자고 말하는 백스터와 셰퍼드 사이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고 여운이 깊게 남는 영화였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사람의 열정과 강렬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길고도 짧은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요하게 여겨야 할 몇 가지 가치가 있다. 그것은 물론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정해야 하는 것이다. 세실리아의 경우에는 '영화'라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느끼고 그 공간에 빠져 자신이 현재 누릴 수 없는 낭만에 젖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이 헛된 것이라고, 회피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 대한 환상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버텨내는 방식이다. 저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운명과 이상을 바랐지만 역시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영화 초반부터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해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마음이 아팠다. 물론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너무나도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에게서 버림받았고 다시 찾아올 냉혹한 현실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태도와 현실타협은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잠시나마 이뤘던 사랑이라는 환상이 앞으로 개봉될 영화들이 그녀의 기억으로 남아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리고 비행기에 탄 셰퍼드의 표정이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매우 짧고 현실과 동떨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영화 속의 세실리아는 현재와 다른 환상 속에 빠지고 싶어서이고, 힘든 현재가 지속되더라도 영화가 있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환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해도 금세 현실이라는 녀석은 그 환상을 깰 테니까. 그래서 이러한 결말에도 씁쓸함으로만 각인되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위안을 삼고 새로움을 꿈꿨던 세실리아가 끝끝내 절망에 빠져도 다시 영화관을 찾는 모습은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영화는 끝없는 절망에 빠지더라도 영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으로 미소 지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 앞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것들을 영화에 녹여내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현실과는 다르게 영화의 공간은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다. 그 안의 인물들은 같은 장면과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낭만을 주로 다루었던 옛날의 영화와는 다르게 현재의 영화는 정말 다양한 주제와 관점을 다룬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른 삶을 경험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위안과 환상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모험과도 같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와 환상을 담아내면서도 현실로 도피하지 않게 만든다. 스크린 속 세상은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그곳을 지킨 영화의 꿈과 희망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