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집의 정령> 리뷰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며 1973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제21회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조개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스페인 내전 직후의 1940년 스페인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형식적인 평화 뒤에 숨겨진 잔혹한 내전의 역사와 고립된 인물들의 응어리진 슬픔을 그려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비극을 묘사하지 않아도 참혹한 현실의 무게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벌집의 정령>이 바로 그런 영화다.
1940년 스페인의 카스티야 주 세고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마을 Hoyuelos에 "영화가 온다!"라는 말과 함께 이동 영화트럭이 도착한다. 마을에는 영화 순회상영이 열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최고의 영화가 상영된다는 말과 함께 영화를 홍보하는 관계자들의 말에 따라 마을회관에 사람들과 아이들이 몰려든다. 그렇게 1931년 제임스 웨일 감독의 작품 <프랑켄슈타인>이 본격적으로 상영된다. 아나는 영화를 감상하지만 왜 프랑켄슈타인이 여자아이를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나는 언니 이사벨에게 프랑켄슈타인이 왜 여자아이를 죽였는지 또, 사람들이 왜 프랑켄슈타인을 죽였는지를 물어본다. 그 질문에 이사벨은 둘 다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모두 가짜라고 말하며 더불어 프랑켄슈타인은 정령이며 자신이 우물 있는 빈 오두막 집에서 봤다고 말한다.
아무도 내전의 흔적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평화는 가정에도 스며들어 소통도, 사랑도 자리잡지 않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항상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어머니는 편지를 쓰는 일에만 몰두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아이들은 텅 빈 들판에서 뛰어놀았다. 경계 어린 모습보다는 무기력하고 지친 기색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고립된 인물들의 고인 슬픔이 젖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큰 동요를 하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정도였다.
그 경계에서 벗어난 인물 아나는 언니의 거짓말에 휘둘려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눈앞에는 직접 본 적도 없는 영화 속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아른 거렸지만 어디에도 프랑켄슈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나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아나는 다리에 상처를 입은 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를 정령이라고 믿은 아나는 아버지의 겉옷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만 다음 날 병사는 사살되고 만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시 그를 찾아온 아나와 군인에게서 자신의 옷이 발견된 점을 의아하게 여겨 뒤따라온 아버지와 마주치자 숲 속으로 도망친다.
일률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체제에서 살아가던 아나는 정령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 숲 속을 방황하며 그 속에서 무언가는 소녀를 깨웠다. 아나가 끝에 무엇을 보았는지는 추측만 가능하다. 어쩌면 아나처럼 무언가를 인지하고 보아야만 벗어날 수 있는 무기력의 사회를 보여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영화는 아나가 꿈꾸는 것과 목격한 것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 관객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할 여지를 남겨 결코 끝나지 않을 현실에서도 주체적인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꿈꿀 수 있으며 다양한 생각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아나의 망상으로만 생각했던 정령 탐험기는 결코 헛된 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영화가 괜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극 중 아나가 존재하지 않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정령을 찾아 나서게 되는 모습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사실 평화로 가장된 혼란스러운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에 도전한 인간의 이야기라고 소개된다.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죽은 자의 육체를 꿰매어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한다. 이는 금단의 영역과도 같은 생명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이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본다. 이처럼 영화 속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파멸시킨 가여운 존재이다. 즉, 이 영화는 신에 도전한 인간의 욕망의 결과물이자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질적인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배타적으로 대했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끔 만들었다. 이처럼 <벌집의 정령>에서는 괴물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항적인 존재'로 묘사하여 국민들에게 복종과 통제를 요구한다. 또한, 젊음으로 상징되는 저항, 변화, 개혁과 같은 의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경계한다.
어른인 우리에게도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아이에게는 얼마나 불합리하게 다가올까. 그것을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할 상황에서 정확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올바르게 무언가를 제대로 배울 수 조차 없다. 어떤 생각과 확신을 드러내게 만들기 전에 부여받은 생각들을 주입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사상을 만들어낸다고 영화에서는 말하고 있다. 아나를 바로 잡아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보이는 현실에 갇힌 어른들과 함께 무너져 가는 한 국가의 몰락 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에선 좌파 인민전선 정부(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쿠데타군(국민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3년 간의 전쟁을 통해 국민파가 승리했고 많은 공화파 시민이 내전 후 처형되거나 숙청당하거나 망명했다. <벌집의 정령>은 잔혹한 내전의 역사와 왜곡된 역사의 변주곡 속에서 고립된 인물들의 슬픔을 다룬 영화이다. 특히 전쟁 당시의 상황이 아닌 전쟁 후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감정을 더욱 섬세하게 그려낸다.
일정한 프레임 속에 놓인 인간의 세계는 벌집의 세계처럼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람의 의식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시계판처럼 둥글게 움직이는 회전운동을 통해 계속 윙윙대며 다른 벌들을 부단히 선동하는 걸 누군가 보고 있다." 이 말처럼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또한, 파괴되어 가는 것들을 지켜만 봐야 하는 사람들의 무기력함과 꺼져가는 저항의식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자유라는 동력을 잃은 사람은 무기력과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들이 침묵으로 유지한 평화가 계속해서 지켜질 리도 없다.
분명히 공포 스릴러 소재의 영화가 아님에도 <벌집의 정령>이 보여주는 현실은 매우 공포스럽다. 특히 독재 시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우리의 역사와 맞닿아 있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독재의 어두운 역사와 12월 3일 사태를 직접 경험했기에, 자유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권력을 가진 어른들이 아이들이 살아갈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마치 '침묵이 금'이라는 말처럼,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기회조차 빼앗긴 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춰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육을 통해 저항 의식과 비판적인 사고를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