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시즌입니다.
직장에서도 여행 얘기를 자주 나누게 되는데요.
“저는 완전 J라서, 계획 안짜면 불안하더라고요.“
여행을 즐기는 방식마저 알파벳으로 표현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새삼 MBTI가 일상에 참 깊이 스며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유행이라 부르기도 뭣하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대중적인 수단 중 하나로 꽤나 견고하게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A형은 소심해, O형은 활발해, 같은 혈액형 담론을 우리가 딱히 유행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MBTI와 관련해 제가 가장 흥미롭게 느끼는 주제는 ‘T와 F’ 논쟁(?)입니다. 이제는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T는 결과를, F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보통 고민상담 상황을 예로 들어 T는 해결책을 찾는 것에 집중하고, F는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대략 1년 전 즈음에 T의 부족한 공감능력을 풍자하는 콘텐츠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주로 연인 또는 친구사이에서 T가 F에게 혼이 나는 내용이었는데요. 이 시기에 등장했던 “너 T야?”라는 밈은 이제 실제 그 사람의 MBTI가 무엇이냐와 상관없이 감수성이 부족한 상대방을 꾸짖는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전 우리 사회는 ‘이성’을 ‘감정’보다 더 우월한 삶의 기술로 여겼습니다. 감정은 항상 조절해야 할 대상이었고, 감수성에는 예민함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었습니다. 반면 이성은 그것들을 잘 통제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MBTI 가 등장하고부터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감수성 풍부한 이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저는 이런 시대상에서 ‘마음’을 살펴주길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져있음을 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육아 방법론으로 ‘마음읽기’가 유행인 것도 그런 욕구의 투영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직장에서도 변화가 느껴집니다. 저희 회사는 작년부터 신입사원의 멘토들을 미리 선별해 전문적인 코칭교육을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원 성과평가에서는 평가 과정에 대한 피평가자들의 피드백 절차가 추가되었습니다. 마음을 좀 더 세심히 살펴주길 바라는 구성원들의 니즈에 맞춰 조직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무직 직장인들에게 ‘일’이란 결국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이성을 발휘하려 애쓰는 것에 익숙합니다. 소모된 이성에는 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돌봄이 필요한 이유이고, 그것에 T와 F의 구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타인을 향해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더 깊이 공감하라고 쉽게 다그치는 시대에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정작 각자의 마음은 얼마나 잘 돌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올해로 직장생활 10주년을 맞은 제 자신을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성장, 성취, 커리어 같은 단어들에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최근의 몇 년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무엇이든 이뤄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운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족할 만큼 성취하지 못했고, 몸과 마음은 그만큼 더 지치더군요. 올해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제 자신에게 집중해보고 있습니다. 미뤄왔던 병원 진료를 받으며 건강을 챙기기도 하고, 글쓰기에 있어서는 주제를 한정하기 보다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받아쓰며 제 마음에 조금 더 귀 기울여보기도 하면서요.
우리는 비교가 너무나 쉬운, 또 그만큼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기도 쉬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해주어야 할 사람은 직장 동료도, 가족도 아닌 나 자신이겠지요. 관계로부터 얻는 위로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나 자신에 대한 공감의 몫을 타인에게 미루진 않아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T거든요. 쉼과 회복이 절실한 올 한해만큼은, 제 자신에게 한없는 F가 되어주리라 다짐합니다. 저 잘 할 수 있겠죠? ;-)
※ 커버 이미지 출처 : 유튜브 채널 루키치, <T들은 끝까지 못보는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