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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Jan 05. 2022

투박한 따뜻함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에 다녀와서

무채색에 가까운 엇비슷한 물감들이 겹겹이 칠해져 선이 분명치 않고,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화폭 속 장면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보면, 흐릿한 기억 속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듯 화자가 보았을 모습들이 눈에 선해진다. 투박하고 따뜻한 일상의 장면들.

어떤 그림 속 한 여인은 한 손으론 일감을 머리에 이고 다른 한 손으론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커다란 나목 옆에 난 길로 집을 향하고 있고(<귀로>, 1964), 어떤 그림에선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나무들에 연둣빛 새잎, 분홍빛 꽃망울이 틔어 오르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저 뒤편에선 여인들이 밭일을 하고 있다(<나무>, 1964).


<나무> 1964 / <귀로> 1964

가리워진 듯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들 속엔 아이를 업은 소녀, 빨래터의 여인들, 아이를 업고 절구질하는 여인 등 화자가 마주했던 일상 속 인물들과 나목이 그려져 있다. 얼핏 보면 쓸쓸하고 힘겨 보이나, 잘 보면 그 안에 희망이 담겨 있는 듯하다.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연둣빛 잎과 분홍빛 꽃을 틔워낼, 봄의 전령으로서 나목의 모습. 그 앞에 선 화자의 마음을 헤아리다, 왠지 그것은 한숨과 뒤섞인 사랑, 애틋함, 애잔함, 슬픔, 희망과 같지 않을까 싶어, 잔잔하고 뭉클한 감동이 일어 온다.

화백은 워낙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지긋지긋하다고, 그래서인지 겨울이 채 오기 전부터 봄 꿈을 꾸는 적도 있다고 말한다. “진짜 추위는 나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추위”라고,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늙어가고 오늘까지 내가 이뤄놓은 일 무엇인가 더럭 겁이 난다고. 그럼에도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면 가슴에 오월의 태양이 작열한다고..



<나무(나무와 두 여인>, 1962 / 박완서의 소설 <나목> 중

저문 한 해와 이제 막 맞이한 새해도 화백의 나목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모로도 채워지지 않아 벌거벗은 듯 초라하고, 언제 따뜻한 계절이었냐는 듯 차가운 바람 쌩 불어와, 매일의 삶은 녹록지 않고 내일의 삶은 선뜻 그려지지 않지만.. 이제 잎으로 꽃으로 과실로 채워져 찬란한 봄과 여름을 살게 될 저 나목처럼, 혹독한 날들 뒤엔 다시 따뜻한 날이 올 거라고. 그러니 어제오늘의 우울은 거두고, 나목과 같은 의연함 꿋꿋함을 들이자고.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 정리도 시작도 인사도 온전히 전하지 못해 마음이 석연치 않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새해를 맞이하는 듯하다.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박완서 <나목> 中)

부디 복된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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