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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Mar 15. 2022

시민적 덕성을 키워 나가기

대선 후 단상

대선이 끝났다. 대선 후 며칠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했다. 두서없는 끄적임이라도 남겨볼까, 그냥 흐르는 대로 잊어버릴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들 손 닿는 대로 메모하는 스스로를 보며, 무엇이 되든 한 번쯤은 정리하고 넘겨야겠다 생각하였다. 여러 차례 나누어 적은 노트들을 한데 모아본다.


저마다 아쉬움이, 혹은 보람과 기쁨이 남은 대선이었겠다. SNS를 통해 접한 투표 열기는 매우 뜨거웠고, 여든 야든 지지자들의 결집은 고무적이었다. 다만 주변의 열기와 관심이 깊은 정치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코로나19 초기 달고나커피에 대한 관심이나 심리테스트, MBTI와 같이, 너도 하니 나도 하는 한시적 유행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부디 심심풀이 밈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길.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선출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관심을 갖고 투표에 참여한 시민들에겐 소중한 정치적 자각, 자성의 시간이었길 바라는 마음이다.


정치에 관심 없는 듯 보였던 몇몇 지인들이 개표 후 올린 대선 관련 게시물들이 반갑고 고마웠다. 대선 결과가 어떠했든, 어쨌든 정치는 나의 삶과 떼려야 결코 뗄 수 없다는, 나 혼자 잘 사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결국에 내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는 나 자신과도 필수불가결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저마다 글을 올렸던 배경의 마음은 각기 다르겠으나, 그것이 행복에서 비롯되었든 아픔에서 비롯되었든, 그런 마음과 관심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시민적 덕성도 쌓여갈 것이다.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은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저마다의 표에 담긴 가치와 기준은 각각 달랐을 것이나, 모든 표는 자신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의 스펙트럼 위 어느 지점에 놓이게 된다. 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던져진 표도 있겠으나, 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공동체의 상에 투영하여 표를 던졌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공동체의 상은 무엇이었는가? 나의 이익을 위한다면 주변의 약자를 보고도 눈 감은 척 지나도 아무렇지 않은 공동체? 혹은 약자라고 소외되지 않고 강자라도 특혜 받지 않으며, 아무리 내가 약하고 주변에 속하고 힘이 없더라도 최소한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 혐오를 지지하지 않는 공동체?


그러나 설령 약자를 위하고 혐오에 반대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내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상과 그런 공동체에 부합한다고 상정하는 후보가 그런 이상향에 꼭 들어맞는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마찬가지로 나의 지향과 다른 공동체,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되었다고 하여 내가 바라는 공동체의 이상이 완전히 뭉개졌다고 섣불리 판단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어떤 정당도, 어떤 후보도 혐오와 차별 문제로부터 자유롭다거나 완전무결하지 않다. 혐오와 차별 앞에선 선택적 침묵 또한 위선이기에, 목소리의 크고 작음이 있었을 뿐이지, 저마다 차별, 혐오, 배제 문제에 관해선 최소한 위선적이며, 선택적으로 정의롭다.


물론 당연히,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선출되는 것이 최선이고, 그가 나의 바람대로 선한 공동체를 구축해나갈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선거 결과가 나의 뜻대로 될 리 만무하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패한다.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희망에 들뜬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결코 어느 하나가 더 크거나 작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의 턱밑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기쁨에 겨워 흥에 취할 것도, 비통에 빠져 술 취해 흐리멍덩할 것도 없다. 정신 바짝 차리고, 또렷한 정신으로, 나의 공동체가 선에 가까워갈 수 있도록 각자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혐오에 자리를 내주지 않도록,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도록, 우리는 시민으로서 각자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민이 되기는 뜬구름처럼 멀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무분별한 정보와 언론기사들 속에서 균형을 잡고 양질의 것들을 가려내기 위해선 시민 개개인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만 한다. 시민적 덕성을 키워나기기 위 시민정치교육 시스템이 절실하나 요원하다. 현재로서 최선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계속해서 말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닐까. 옳은 건 옳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바꿀 건 바꾸자고, 지킬 건 지키자고.


대선 전 보았던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마지막 부분에서, 막스 베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도자나 영웅은 아니라 해도,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날 아직 남아 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정치 지도자나 영웅만을 위한 덕목은 아닐 것이며, 오늘날 우리 사회 시민들에게 특히 가장 핵심적인 덕목이자 소명일 것이리라. 이번 대선과 앞으로의 5년은 그 자체로 매우 값비싼 정치적 배움의 기회일 것이다. 정치가 민감한 주제, 대화하기 꺼려지는 주제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화두가 되길 희망한다. 그렇게 의연히, 꿋꿋이 버텨내어, 또렷한 정신으로, 시민적 덕성을 키워내고, 시민으로서 소명과 책무를 묵묵히 해나가길 바란다.


잠깐 쉬며 한숨 돌리고, 잘 먹고 잘 자며 기운 차리고, 다시 시작해보자 말할 수 있길. 그리고 다시, 아침을 간절히 희망하는 이들과 함께, 아침에 가까워올 시간에, 함께 있게 되길 바란다.


정현종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 - 노트 1975」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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