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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Oct 12. 2022

졸업 단상 - 끝,

마침표를 찍었다가, 끝을 살짝 비틀어 쉼표로

졸업. 대학원 입학하고 보냈던 첫 주, 앞으로 무슨 삶이 펼쳐질 줄도 모르고 온통 웃으며 보냈던 기억이 선한데. 벌써 졸업이다. 논문 출판할 때도 학위기 받을 때도 실감이 나진 않았는데, 학사 포탈 증명서 발급 창의 ‘학위 수여 예정 증명서’가 ‘학위 수여 증명서’로 바뀐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행정처리가 가장 큰 기쁨을 주다니. 여하튼, 이제 석사가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만 맞이하는 졸업이면 참 좋을 텐데, 졸업하고 끝내는 기분이 마냥 시원하지만은 않고. 몇 가지 착잡하고 질척 질척한 물음들이 남는다. 그간 지식은 얼마만큼 쌓았는지? 쌓은 지식만큼 지혜로워졌는지? 생각은 깊어졌는지? 마음은 더 깊어졌는지? 너무 쉽게 말하고 썼던 것은 아닌지? 나의 논문은 사회 공동체의 공공재로서 조금의 가치라도 지니게 될지?

석사 논문은 벽돌을 하나 쌓는 정도의 일이라 하던데. 우물 안에 벽돌을 쌓는다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인지? 우물 바깥엔 무엇이 있는지? 하늘에 조금 가까워지는데 의의가 있는지? 다들 저마다의 우물 속에서 벽돌을 쌓고 있는 것인지? 다른 건 차치하고, 내가 쌓은 벽돌은 밟고 오르면 부수어질 벽돌인지, 혹은 그 위에 또 다른 벽돌을 쌓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벽돌일 것인지?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중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중.

입학 전 이 문구를 보았다면 이제 뭔가 진짜 대단한 걸 하는 건가, 하는 설렘과 자부심에 가슴 벅찼을지도 모르겠는데, 과정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보니 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해진다. 가슴 턱 막히고, 어디 숨을 곳 없나 싶고, 옮긴이 선생님 말처럼 자괴감이 조금 들기도. 차라리 논문 다 끝내고 이 문구를 본 것이 그나마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고, 이미 뼈가 가루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처음 시작할 땐 무언가 대단한 끝을 맺을 줄 알았는데, 끝에 가까울수록 나의 부족함만을 여실히 깨닫는 과정이었다. 가슴 한구석 부끄럽고 무거운 마음이 남는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그간 해온 것이 최선이었다고, 긍정적 착각으로 갈음하련다. 다만, 지금의 물음, 마음 계속 들여다보고, 오늘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 계속 채워나가기로 한다. 나중에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 저 문구와 오늘의 물음, 마음을 다시 되새기면 될 것이다. 내일의 나에게 미루는 책임 정도로 볼 수 있겠다 :)



이성복, 『산길2』

마침표를 찍었다가, 끝을 살짝 비틀어 쉼표로 만든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했으니(이성복, 『산길2』 중), 푹 쉬었다가 새로 시작하기로. 끝,


2021.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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