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mundus Feb 06. 2021

토끼의 귀가 긴 이유

어른을 위한 동화

2016년 10월 21일의 이야기.


목요일 저녁마다 어떤 보육시설에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 명목상으론 봉사이지만 봉사라고 하기엔 양심에 찔리고.. 일곱 살 여자 아이에게 한글과 숫자를 알려주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를 만나러 갔다.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드리니 담당자님 옆에 아이가 앉아있었다. ㅇㅇ 안녕, 하고 인사하니 모니터 옆으로 머리를 쏙 빼는데, 뭐가 그리 맛있는지 레모나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담당자님께서는 선생님께도 하나 드리라며 아이에게 레모나 하나를 건네주셨고, 나와 아이는 늘 함께 공부하는 공간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국어 공부로 시작했다. 지난주에 교재 한 권을 다 끝내서 오늘은 새 교재를 가져왔는데, 본격적으로 쌍자음을 배워야 하는 단계인 듯 보였다. 책을 꺼내면서 아이는 이번 교재는 너무 어렵다고 미리 밑밥을 깔아 두더니, 이내 힘든 기색을 보인다.


오늘따라 유독 지쳐 보이는 것도 같아, “오늘은 공부하기 힘드니?” 하고 묻자 아이는 오늘 하루 힘들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공부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낸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영어 공부를 너무 많이 했어요. 그리고 태권도도 하고 와서 너무 힘들어요."


태권도를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오늘은 격파를 하고 왔다고 하길래 흠칫 놀라 물었다.


"우리 ㅇㅇ 격파도 할 줄 알아요?"


아이는 나를 한심한 듯 보더니 이런 대답을 한다.


"일곱 살이면 다 하거든요."


그래.. 잘났다.. 여하튼. 이대로는 공부를 진행하기 힘들 것 같아, “오늘은 놀까?” 하고 물으니 아이는 언제 피곤했었냐는 듯 밝게 웃는다.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놀기로 했으니 놀아야지.


그러더니 아이는 아까 담당자님에게서 받은 레모나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이거 이모가 선생님 주라고 했던 건데...” 하며 말끝을 흐린다. 먹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 같아서, 선생님은 괜찮다고 먹으라고 하니, 다시 물어볼 새도 없이 엄청 환하게 웃으며, 세상 다 가진 듯 짜릿한 표정을 짓는다. 또 당했다. 그러고는, 레모나는 손가락으로 조금씩 찍어 먹을 때가 제일 맛있다 하면서 작은 봉지를 쑤셔가며 쪽쪽 빨아먹는다. 거참, 먹을 것 하나면 기분이 싹 풀리는 건 애나 어른이나 똑같나 보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떠들썩하게 있다가, 아이가 내 모자를 갖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려 할 때, 책장에 꽂혀 있던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에게 “오늘은 그럼 같이 동화책 읽을까?” 라고 물으니 또 그러자고 한다. 아이는 어린양에게 친구들이 몰래 생일파티를 해주는 내용의 동화책을 읽어 달라 했다. 그 책을 시작으로 한 권, 두 권, 세 권, 네 권 등등.. 의 책을 읽어주었는데, 동물들이 어린양에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주는 장면에는 이런 예쁜 표현도 있었다.


“나는 몰랑몰랑 크림으로 장식을 할게.”


국어책 읽듯 어색하게 읽는 나의 동화에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했는데, 고맙게도 아이는 나에게 재미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뭐 구연자의 능력과 상관없이 내용이 재미있으면 애들은 재미있다고 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렇게 총 열한 권의 동화를 읽어주자, 레모나를 쪽쪽 빨아먹으며 그렇게도 장난기가 많았던 아이는 이내 피곤한 듯 하품을 한다.


그렇게 오늘의 만남도 끝이 나고.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2시간씩 갖는 아이와의 시간. 아이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 걱정과 부담을 가득 안고 들어가서는 이내 아이의 투명한 눈에 나의 눈도 맑아지고, 아이의 환한 웃음을 내 얼굴에도 그리며 돌아오는 시간. 이 시간에 봉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아이에게 봉사시간을 주어 차곡차곡 채워나가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오늘 읽은 동화에는 인상 깊은 구절이 많았다. 다음은 토끼의 귀가 긴 이유에 대한 동화의 내용 중 일부인데, 잘못을 할 때마다 아빠 토끼가 귀를 잡아당겨서 귀가 길어진 아기 토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기 토끼가 자라서 아빠 토끼가 되면
자신의 아빠가 했던 것처럼
아기 토끼들이 잘못할 때마다
귀를 길게 잡아당긴다는 거예요.

<토끼의 귀가 긴 이유>, 마르틴 아우어.



아이들을 위한 동화일 텐데, 어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는지. 아이를 위해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동화부터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겠다.


-


그때 만났던 아이는 이제 벌써 초등학교 5학년 진학을 앞두고 있겠다.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매주 만나 알려주던 나의 이름도 다시 만나면 늘 까먹고는, 나의 이름 대신 장난 가득한 웃음만을 전해주던 아이였으니까.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이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어린양의 생일 케이크에 장식으로 꾸며주던 몰랑몰랑 크림은 기억할는지.


2016년 가을 즈음, 아이를 만나러 가던 날들의 캠퍼스


작가의 이전글 불행을 나누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