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km를 걸어 별들의 들판에 서다
광장에 주저앉은 사람들. 휘날리는 깃발. 대성당의 종소리. 우는 남자. 광대.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재회. 아쉬움. 허탈함. 고독함. 노랫소리. 자전거들.
800km를 걷는 동안 발에는 물집이 잡혔다가 어느 순간부터 굳은살이 되어 떨어져 나갔고, 시커멓게 타버린 얼굴은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에 익숙해져 버렸다.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노(Uno하나),도스(Dos둘),트레스(Tres셋)가 터져 나왔고 걷는게 더 익숙해진 다리는 산티아고 시내를 헤매자고 보챘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그런건가보다. 익숙해져 버린 나를 벗어나 새로운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를 보는 것. 별 감흥이 없다고 느끼지만 되돌아보면 늘 내 곁에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걸음 하나하나마다 기적 아닌 것이 없는 것. 모두 같은 길을 걷지만 모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자신만의 표지를 만나는 것. 달라진 자신을 그제서야 깨닫는 것.
[8.20 수요일 / 걸은지 34일째] 계획보다는 하루에서 이틀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을 걸을거면서 미리 계획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 대충 나눠놓았던 일정이었지만 어떤 날은 10km도 걷지 않았고, 어떤 날은 40km를 넘게 걷기도 했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하루를 더 묵거나 충동적인 야간행군과 낮잠, 이 길은 인생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의 호숫가에서 야영을 하고, 일어나 걷다 보니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저절로 산티아고에 입성했다. 대성당은 공사중이었지만 성야고보 사도의 무덤은 빛났고 광장은 들떠있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셨다고 한다. 젊은 보이티야 시절 그도 혹시 이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닐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순례자에게는 하늘에서 연옥의 잠벌을 면해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나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날을 기다리며 하세월 하지 않아도 되겠다.
산티아고 시내를 관통하여 광장에 도착하니 보고싶었던 길 위의 벗들이 그제야 떠오른다. 마지막 세요를 받아들고 순례자사무실을 찾아가 순례증명서를 받아들었다. 그 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길에서 만났던 스테파니 아줌마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순례의 완성을 축하해주고 간다. 그들 방식의 포옹으로 인사하는 이도 있고, 악수만 나누기도 했다.
내가 이 길을 걸었던 2014년은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산티아고에 들어온 지 800주년이라 프란치스꼬 수도회 성당에서 또 하나의 순례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매우 특별한 희년이었던 것이다.
함께 한국을 떠나왔던 정호씨와 연락이 되어 광장 한모퉁이에서 기다리는데 어느 일본인이 꽤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사리아에서부터 걸었다고 한다. 그에게도 특별한 순례증명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아주 좋아하며 수도원을 찾아갔다.
성 야고보의 무덤성당인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만의 사연을 가지고 모여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걸은 사람, 기적을 바라고,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며,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사랑하던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잊기 위해, 약속을 지키려고, 그냥...
모두의 소망이 광장 위의 공기중에 둥둥 떠있으니 이 곳이 특별해 질 수 밖에 없다.
성당 지하의 관에 누워있는 것이 실제로 사도 성야고보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다. 이미 나의 순례길에서 그분은 늘 함께 했으니.
계속해서 산티아고 도착 이후 버스를 이용해서 찾아간 묵시아와 차를 렌트해서 여행했던 포르투갈의 포르투, 파티마, 스페인의 토마르와 톨레도, 바르셀로나 등의 여행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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