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에서 지중해까지, 우리의 렌터카 여행도 그렇게 끝나간다
바르셀로나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처음에는 함께 밤새 놀기로 했던 외국인 친구들을 찾아서, 그들을 못 찾은 뒤에는 그저 바르셀로나의 밤을 느껴보고 싶어서 무작정 걸었다. 현지인처럼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도 해보고, 광장의 롤러브레이드 쇼도 구경했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두려움 같은건 없었다. 40여일간 아무런 사고도 범죄도 겪지 않았기에 자신만만했다. 어차피 남은 돈도 얼마 없으니 강도를 만나면 힙쌕을 던져줘버리면 그만이다. 그깟 두려움에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을 허비해 버리기는 아까웠다. 사람들은 새까맣게 탄 동양인에게 '올라'를 외치며 손을 흔들어 주곤 했다.
2014.8.26 화
이름 모를 아라곤의 산 속,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샘터에서 마지막 야영을 하며 스페인의 별 구경을 실컷 했다. 은하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시 갈 수 있겠지. 프랑스의 남쪽 마을 생장에서부터 800km, 날마다 새로운 모습과 흥분되는 풍경들, 오래된 건축물들과 친절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동질감에 더욱 편하게 말을 나눴던 전세계의 순례자들, 특별했던 음식들과 바들.
아라곤의 깊은 산 속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채 아침을 맞았다. 텐트를 정리하고 샘물로 세수도 대강 한 뒤 차에 짐을 구겨넣었다.
오늘로 우리들의 렌터카와도 이별이구나. 산티아고에서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로, 포르투에서 파티마로, 파티마에서 토마르, 그리고 톨레도를 거쳐 여기까지 벌써 1천km가 넘는 거리를 무사히 달려주었던 자랑스런(?) 대한민국산 렌터카.
그리고 이제 마지막 산들을 넘으면 지중해를 만날 것이다.
급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완만해진다 싶더니 곧 지중해변 마을 비나로스(Vinarós)다. 산 위에서부터 지중해가 보여 가슴이 뛰었다. 빨리 바닷가에 다다르고 싶어 과속도 했다.
마을에 도착하여 해변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른다. 좁은 도로의 끄트머리쯤 정면에 해가 떠오른 지중해가 보이는 길가 주차구역에 차를 세워두고 드디어 해변으로 나섰다. 시간은 오전 10시가 넘어섰다.
꽤 아름다운 해변이고 뜨거운 여름이지만 자릿세 따위는 없다. 그저 집에서 들고 온 양산이나 빌려온 파라솔을 꽂아두고 여유롭게 지중해를 즐기면 그만이다. 광고문구로 치장한 채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는 똑같은 색의 파라솔 줄도 보이지 않는다. 해변의 노점 바에서 파는 커피와 슬러쉬 등의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해수욕장이 아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지중해와 비나로스 해변에 빠져 한참을 보냈다. 하루 정도는 이런 곳에서 지내고 싶지만 이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서 렌터카를 반납할 시간이 다가온다.
비나로스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해변의 고속도로를 타고 거의 두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면 마지막으로 시내 투어를 한 다음 몬세라트의 수도원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스페인의 건축가이며 세계의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그의 어린시절 가장 많은 영감을 심어준 곳이 바로 몬세라트의 자연과 수도원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의 미완성작인 사그라다파밀리아와 몬세라트를 함께 보아야 예의이지 싶었다. 하지만 결국 몬세라트에 오르지는 못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후 피곤해 하는 정호씨는 숙소로 먼저 향했다. 나는 몬세라트를 먼저 다녀오기로 하고 복잡한 시내를 벗어났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했다. 이러다가는 몬세라트는 커녕 사그라다 파밀리아에도 못 들어가게 생겼다. 결국 몬세라트를 포기했다. 아니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렌터카 사무실에 들러 차를 반납했다. 무사고에 차량도 깨끗하게 사용했으니 예치금은 전액 돌려받을 것이라고 했다.(한국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치금 전액이 환불되었다)
이제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야 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일단은 홀로 거리로 나서본다. 지도 어플 하나에 의지해 가며 방사형으로 난 도로를 따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건축의 현장을 멀리서 목격한 뒤 깨달았다. 구엘공원이나 몬주익 언덕, 까테드랄, 바르셀로나 해변을 가보기는 글렀구나.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하나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르겠구나...
한참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뒤에야 저녁 여섯시 반 쯤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Basilica de la Sagrada Familia 성가정 성당) 내부에 입장했다. 자연의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면서 성당의 분위기를 때로 화려하게 때로 경건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내친김에 종탑 꼭대기에도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오른 후 도착한 종탑 꼭대기에서는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일대가 빤히 보인다.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 대신 종탑의 계단을 택했는데 중간 중간 창을 통해 성당을 짓고 있는 현장과 지중해에 떠 있는 배들과 다양한 삶이 오가는 모습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가우디의 열정과, 작품들과, 어이 없는 죽음과,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축을 보며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서는 길.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개선문(Barcelona Arc de Triomf)과 광장이 나온다.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시우타데야 공원(Parc de la Ciutadella)이 나온다고 하는데 돌아갈 것을 생각해서 되돌아 섰다. 시내를 걸어서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도 무척 아파왔다. 30여일 동안 800여 km를 걸었던 체력은 어디로 간걸까?
숙소로 돌아오니 좁은 진입로에 호주, 독일, 캐나다 등 다국적 청년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다가 나에게도 한 캔을 건낸다. 잘 되지 않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 친구가 "우리 밤새 놀건데 같이 밤새지 않을래?" 한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밤을 거리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선은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해야겠다고 하니 어딘가로 오라고 가르쳐 주고는 몇몇 친구가 먼저 거리로 나갔다.
물론 씻고 장을 보고 저녁을 해먹고 우리 방 어느 침대에서 베드벅스가 나왔다며 잠시 소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침대를 옮기고 하는 사이 그 친구가 가르쳐 준 장소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일단 거리로 나가보기로 했다. 혼자 으슥한 밤거리를 나서자니 조금 오싹해졌지만 곧 자신만만해졌다. 그 먼 길을 걸어왔고, 수많은 도시를 걸어다녔고, 산적이라도 나올 법한 산길도 수없이 다니지 않았나. 하지만 소매치기 하나 만나지 않았던 내가 아닌가. 그리고 돈도 얼마 안 남았으니 강도라도 만나면 내 힙쌕을 던져주고 말지 뭐.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낯선 밤거리를 헤매며 얼굴도 비슷비슷한 서양친구들(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거리로 나서면 만날 줄 알았다)을 찾는다는건 행운이 따르지 않는한 어렵다. 그저 바르셀로나의 광장과 거리를 즐기기로 하니 마음도 편해졌다.
그리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고딕지구도 가보지 못했고, 대성당과 몬주익 언덕, 구엘공원과 가우디의 건축물들, 항구와 해변도 제대로 못 보았으며 몬세라트도 들르지 못했다.
여행의 막판에 이렇게 시간이 아쉽게 흘러갈 줄이야. 바르셀로나는 일주일 정도 여유를 잡고 따로 여행을 와야 할 도시임에 틀림 없다. 그래 이렇게 아쉬움을 남겨 두어야 또 올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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