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라고 말하는 순간

by 물리학자

인테리어 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게 정답이네라는 댓글을 보게 되었다.


정답이 없는 인테리어 분야에서 정답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며 다른 댓글을 무심히 봤더니 생각보다 그런 댓글이 많았다.


이게 맞다, 이 방식으로 해야지와 같은 말은 우리가 쉽게 일상에서 접하곤 한다. 젓가락 쥐는 법, 청소하는 법, 하다못해 게임하는 법조차 가장 최적화된 방법을 추구하며 서로 공유한다. 이런 '정답'을 접할 때마다, 나는 쉽게 납득하기보다, 이게 왜 정답이 되었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가 프랑스에 방문연구를 떠났을 때의 이야기다. 배정받은 연구실에는 프랑스인 학생이 많았고, 현지에서 친구가 없던 나는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당시 나는 프랑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그들과 서툰 영어로 소통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 시간이 부담스럽지 않고 흥미로웠다.


그들은 한국 영화를 좋아했고, 미국의 소위 할리우드 영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연구원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한국 영화와 그 감독을 좋아했는데, 반면 그 영화를 지루한 영화라며 맹렬히 싫어하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안 봤기에 듣고만 있었는데 학생이 저렇게 얘기해도 되나 싶으면서도 흥미롭게 둘의 토론을 들었었다. 때때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교수의 주장을 학생이 반박하는 상황도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화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입장과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 사회는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도,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고도, 서로 다른 주장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에 살았던 것이 내가 20대에 얻은 값진 경험 중에 하나였다.


그런 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마치 모든 것에 정답이라는 게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솔직히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결론일 뿐, 나의 결론이 아닐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한국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당신과 다른 결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당신과 나는 적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다른 사람도, 주장이 강한 사람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싸움으로 번지거나, 혹은 배척당하는 경험 때문에 조용히 침묵하거나,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과 따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나는 게임을 할 때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물론 내가 최고가 되고 싶을 때, 순위에 들고 싶을 때는 나도 공략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추천 빌드를 하지만, 게임이라는 게 꼭 최고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임을 하는 목적이 최고가 되기 위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의 방법으로, 혹은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들 각자의 정답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물리학은 가장 정답을 추구해야 하는 학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가 물리학에서 배운 것은 바로, 정답이란 언제든지 새로운 관찰을 통해 엎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태도를 늘 가지고 있어야 이론에 매몰되어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정답으로 여겨졌던 뉴턴의 법칙은 아주 빠르게 움직이거나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관찰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보완이 되었다. 우리의 정답도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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