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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Sep 22. 2022

25 일단 미루고 보게 된다




며칠째 이제는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싶은 마음에 조급해만 하고 있다. 한 번도 나를 과대평가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온갖 핑계를 대고 놀아대는 걸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다녀왔으니 쉬어야겠다. 집중 안 한 지 몇 시간째인데 그냥 놀아버리지 뭐. 그런 식의 생각을 하면서 착실하게 하루씩 노는 날이 늘어버렸다.




아이디어가 언제든 튀어나오도록 준비해왔더라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저번 학기에 하던 작업은 전부 과거에 남겨두고 새로운 걸 시작하기로 결정했으니. 학기마다 이런저런 주제를 오가며 작업하게 되는 것은 어떤 주 제이던 간에 파고들다 보면 더 갈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걸로는 할 만큼 했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주제에 대한 나의 의식과 분석이 그만큼 얕았던 것이겠지.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마는 것 또한 딱히 그 주제여야만 한다는 집념이나 헌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흥미로워 보인다고 입 밖으로 내뱉어버려 만든 것들로 포트폴리오가 차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영감은 노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뭐든지 회피하고 보는 나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 자체가 싫어져서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생각에 부딪혀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계속해서 당장 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해야 할 것들에 매달리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결국 뭔가를 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는 것이다. 생산적으로 일을 미루는 것이란 바로 그런 모습이겠지. 마치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는 누군가의 추궁에 대비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하루 종일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며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사실 누구도 나를 재촉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 내가 날 잘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겠지만 말이다.


졸업 전시를 하는 마지막 학기는 다른 학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마지막의 한 전시를 위해 뭔가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한 학기 내내 유지된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없고 오직 전시 날짜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많아 보이는 착각이 가장 큰 적이 될 것이고, 초반의 여유로움 또한 독이 된다. 작년에 한번 그런 시간을 보낸 나는 깨달은 것 없이, 혹은 깨달음만 있고 실천할 마음은 없이, 이번 학기로 넘어오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그림을 그려내지 않게 되니 덜 성실해지는 것 같기만 하다. 물리적 표면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은 나아간다는 감각이 즉각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화면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왠지, 진도가 나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도 같고, 이미 뭔가를 만들어버린 것도 같다.


반쯤 만든 것들이 폴더에 수북이 쌓인다. 분명 그 디지털 데이터는 내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차지하고 있지만 왠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게도 실체도 없는 것 같은 파일들이 ‘제목 없음-1’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화면에 떠있다. 만들다 만 것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썸네일을 보다 보면 그 존재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진다. 물성이 없는 작업물은 포기하기 쉬워진다. 그것들은 왠지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만들어내는 것들이 아무리 내가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차원으로 변환된다 하더라도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 무언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시스템이 보여주는 것을 통해 이를 인지할 뿐이다. 기계들은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작동하면서도 내가 아는 방식으로 이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간극이 크게만 느껴져 뭘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해야만 하는 것. 그런 애매한 느낌에 갇혀 작업을 하다가 하지 않다가 결국 하게 된다. 애매하게 이것저것 만들어볼 시간조차 없는데, 나는 아직도 그 정도에 머물러 있으니 당황스럽다. 20일이 지나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는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이다. 지금껏.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학기 초의 흐리고 원대한 꿈은 조금의 피로에도 휘발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습관적으로 움츠리는 어깨 때문에 결린 근육, 왠지 아파오는 팔꿈치, 별생각 없이 마셔 댄 커피 때문에 쓴 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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