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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모음

7년 만에 노트북을 새로 장만하다

이번엔 맥북 사고 싶었는데.

by 할때하자

오늘은 내 여름휴가 이틀 중 두 번째 날이다. 어제는 당일치기 부산에 다녀왔고 (4년 전만 해도 부산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부산은 나의 최애 도시가 되었다) 오늘은 세종에서 늦잠 자고 집 청소하고 글 쓰고, 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휴가가 더 길었다면 여행 처돌이인 내 성격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국에 나갔겠지만(올해도 벌써 나트랑, 교토, 방콕 세 군데를 다녀왔다. 자중하자) 일요일 밤까지 회사에 있다가 주어진 고작 이틀의 휴가는 아무래도 짧다.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프랑스 대사관과의 미팅이 잡혀있다. 아참. 오늘은 새 노트북과 함께하는 첫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인데 전혀 계획에 없었던.. 노트북에게 바치는(?) 글이나 써보려 한다.


부산 또 가야지~~~! (식당 정보는 댓글로 문의)


1.

대학교 진학 후 처음 샀던 노트북이 생각난다. HP의 1.31kg짜리 까만색 노트북이었다. 과외하며 모은 쌈짓돈을 들고, 용산 전자상가까지 직접 가서 업어온 녀석이었다. (노트북은 전자상가에 가서 현금가에 구매하는 것이 당시엔 제일 저렴했다. 지금은 이벤트 기간을 잘만 활용하면 온라인 구매가 더 싸다) 고등학생 시절 집 컴퓨터를 내 맘대로 쓰는 시간은 오직 인강을 들을 때뿐이었는데 개인 노트북이라니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누군가 채가지는 않을까, 박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HP 노트북은 탐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설렘도 잠시. 새 노트북은 정말 구렸다. 70만 원대에 샀던 가성비 모델이었는데, 무거운 건 둘째치고 너무 성능이 안 좋았다. 분명 하드웨어 성능은 좋았는데, 무슨 프로그램 충돌이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오류들로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였고, 6개월도 쓰지 않았는데 고장까지 나는 바람에 수리 센터에 찾아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다시는 외산 노트북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이유는 수리센터가 전국에 한 곳인 데다 그마저도 서비스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넘겼다.


2.

다음으로 구매했던 모델은 삼성, 1.3kg 모델이 무거워 조금 더 가벼운 1.19kg 모델을 구매했다. (숫자가 왜 이리 디테일하냐고? 난 원래 쓸데없는 숫자 외우기에 능하다. 국사 공부할 때 연도 외우는 데에 소소한 도움이 된다) 역시 100만 원도 하지 않는 가성비 모델이었는데, 5년 넘게 만족하며 사용했다. (사실 중간에 한번 노트북을 바꾸려 했는데, 20만 원 저렴하게 사려다가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해.. 못 바꾸었다. 이 일화는 나중에 다른 글로 풀어보겠다) 내가 학점을 이수하는 데에는 그 녀석이 일등공신이었다. 나와 모든 수업을 함께한 진정한 메이트. 롤이 돌아갈 정도의 성능이었으니 제법 훌륭했다.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등을 맞대고 열심히 롤을 했던 기억이 난다. (밥이나 벌어먹겠나 싶었던 그 녀석은 지금 어느 정출연을 거쳐 국립대의 교수가 되었다. ...세월 뭐지? 쏜살같네.)


3.

세 번째 노트북도 삼성 제품이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 내 곁을 지켜주었던 가장 고마운 노트북이다. 이 녀석과의 만남은 다소 급작스러웠고, 충동적이었는데. 얽힌 일화는 이렇다.


나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행정학 과외를 했는데, 내 수업은 이론수업 + 답안첨삭으로 구성돼 있었다. 학생들이 매주 10페이지의 답안을 제출하면 나는 하나하나 첨삭해 수업시간에 해설해주곤 했다. 수업은 제법 인기를 끌어 한창 때는 약 50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매주 50명의 답안지를 첨삭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10페이지 주기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500페이지의 글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가며 읽는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학생들이 답안을 제출하면 신림 복사집에서 답안을 모두 출력한 뒤, 수기 첨삭을 진행하고, 첨삭본을 복사집에서 스캔해 파일 형태로 올려주는 방식으로 답안을 관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첨삭본 한 뭉탱이를 들고 수업에 들어간 날이었다. 2018년이니까 제법 예전임에도 그 팀의 학생들은 모두 태블릿을 활용하고 있었다. 태블릿을 꺼내둔 7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나 홀로 A4용지 뭉탱이(답안 첨삭본)를 책상에 '턱'하니 올리자, 그들은 모두 기겁을 했다. 빨간색 플러스펜을 꺼내자 한번 더 기겁했다.

"선생님, 혹시 여태까지 손으로 첨삭해서 올려주시는 거였어요?"

"네 당연하죠"

"왜 태블릿 안 쓰세요? 혹시.. (쓸 줄 모르세요?)"

그들은 괄호 뒤의 내용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내게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그럴 리가 있겠냐며 다 같이 껄껄 웃다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렇다. 난 태블릿으로 첨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허, 참 놔. 오늘 수업 끝나고 사러 가겠습니다"


그 당시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돈을 잘 벌고 있었다. 게다가 수업을 위한 용도라니 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태블릿은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아이패드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태블릿의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는 노트북을 구매하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는 그 길로 용산으로 이동해 노트북을 구매했다. 그리곤 일주일 뒤 수업에서 기세등등하게 노트북을 꺼내어 보이며, "거 봐! 산다고 했제?!"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디지털 문맹에서 벗어난 선생을 갸륵하게 쳐다보았다.


삼성 노트북 펜S. 화면을 360도 꺾어 뒤판에 붙이면 태블릿처럼 사용이 가능했고, 본체에 펜도 내장되어 있는 훌륭한 노트북이었다. 무게는 990g밖에 되지 않아 갖고 다니는 데에 불편함도 없었다. 그 녀석을 들고 서울, 세종, 전국 각지를 돌며 과외도 하고,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쓰고 다 했다. 은인 같은 고마운 녀석이었다. 내 실수로 충전기를 고장 낸 한 번을 제외하고는 수리센터 한 번 갈 일이 없었으니 성능도, 내구성도 만점이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나자 이 녀석도 나이가 들었다. 보호필름을 붙여놨지만, 여기저기 긁히고, 배터리는 수명을 다해 충전기를 꽂지 않으면 전원을 켜지 못하는 '유선 PC'가 되었다. 사이즈만 노트북일 뿐. 어느 날인가 한번 바닥에 떨어뜨려 한쪽 구석이 조금 깨지기도 했다. 수리센터에 가서 약 30만 원 정도 부담하면 말끔히 수리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동영상 편집과 AI를 활용하는 데에 부족한 성능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4.

노트북을 바꿔야겠다 생각한 건 몇 달쯤 되었지만 이번에도 본격적으로 마음먹은 이후 구매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즘 회사 업무가 무척 많아 자정 무렵 퇴근하기 일쑤인데, 중요할 때마다 노트북은 도통 켜지지를 않으니 (회의실에 콘센트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점 의존도도 활용도도 떨어져 갔다. 마침 글을 열심히 써보겠다는 장황한 계획을 브런치에 지르기도 했고 내게도 리프레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라 어차피 바꾸기로 결정한 이상 오래 고민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실은 맥북을 사고 싶었다. 갤럭시 S2로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 나는 10년 사이 지독한 앱등이로 진화했는데, 지금은 아이폰 15프로, 애플워치 울트라, 에어팟 프로(를 쓰다가 지금은 드비알레로 넘어왔다), 아이패드 미니, 애플TV(셋톱박스)까지 완벽한 애플 생태계 속에 살고 있다. 오직 맥북만 빼고. 맥북은 내게 남은 퍼즐 한 조각 같은 존재다. 맥북을 펼쳐두고 카페에 앉아있는 건..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존중해 줘) 아직도 로망이다.

그러나 맥북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회사 서버 접속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한글 프로그램과의 호환이 구리다는 점이었다. 물론 맥북의 문제는 아니고 회사의 문제라고 봄이 타당하다. 아무튼 업무용으로 쓸 수 없다면 의미가 없기에.. 금방 포기했다. (맥북 쓸 수 있는 직장으로 이직할까?)

원래도 데스크톱은 직접 조립해서 쓸 만큼 PC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모델을 결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틀 고민했나? 삼성/엘지 모델 중 무겁지 않고 성능이 괜찮으면서 가격도 좋은 녀석을 찾았다. 때마침 카드할인이 크게 적용되는 좋은 모델을 찾아 얼른 구매 버튼을 눌렀다. 큰 지출이 부담되었지만 절친한 친구가 남긴 명언인 '사그 안 안부안(사도 그지 안 되고 안 사도 부자 안 된다)'이 떠올라 결제했다.

나의 네 번째 노트북은 LG그램이다. HP, 삼성에 이어 처음으로 만난 LG 제품이다. 그램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태 인연이 닿지 않았는데, 화면 큼직한 올블랙에 Pro 모델로 디자인과 성능을 고루 따져가며 구매했다. 1kg 미만 모델을 사고 싶었는데, 초경량 노트북 시장은 태블릿 시장으로 흡수된 것인지 더 이상 삼성 엘지 어느 곳에서도 1kg 미만의 제품은 출시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고른 모델은 1.24kg이다. 본체가 무거워진 대신 충전기는 가벼워졌으니 총무게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옛날 노트북 충전기는 대단한 벽돌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핸드폰 충전기랑 크기가 비슷해졌다)




앞으로 이 녀석과 함께 어느 장소에서 어떤 글들을 써 내려갈지, 벌써부터 긴 여정이 기대된다. 내가 머무는 장소, 앉아 있는 카페, 마시는 커피가 바뀌어도 이 녀석은 함께하겠지? 글 쓰는 취미? 직업? 덕에 함께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물건에 정을 품지 않는 성격임에도 유독 노트북에겐 정이 간다. 사람이었다면 거하게 환송회라도 해주었을 텐데, 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함께해 준 나의 세 번째 노트북에게도 고맙다. 흠있는 부분 수리해서 나보다 잘 써줄 누군가에게 보내주어야지.

아직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 녀석과는..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까? 2030년에는 함께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이전 노트북이 내게 해준 만큼 도움을 많이 주려나, 새 노트북과 함께 다시 한번 삶의 고삐를 조이자 다짐한다.


(좌) 2018~2025 글쓰는 삶의 시작을 묵묵히 지켜봐준 고마운 녀석 / (우) 이제 막 입사(?)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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