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 정확 중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도통 시간이 나질 않는다. 새 과로 옮겨온 뒤 급격히 늘어난 야근 탓이다. 매일밤 11시경 퇴근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귀가 후엔 얼마 남지 않은 하루가 아까워 쉽게 잠들지 못한다. 남은 시간이라도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골똘히 궁리해 보지만, 집필하겠다던 책이나 촬영하겠다던 영상 어느 하나 또렷하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자정 무렵엔 체력도 정신력도 모두 고갈되어 버리는 탓이다.
사무관이 된 지 만 6년이 넘었다. 고시 합격도 8년 전으로 이제는 아득하다. 여섯 해의 사계절을 보내면서 왜 우리들은 항상 바쁠 수밖에 없는지 고민했다. 연차가 참에 따라 그 이유를 점점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 글을 쓰기 전부터 다소 절망적인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누군가 이 조직의 현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글을 쓴다.
업무용 메일함을 열어 보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수많은 메일들이 쌓여 있다. 업무 협조 또는 자료 작성을 요청하는 메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십 통이 오는데 (참조 메일까지 합하면 일일 20~50통 정도를 받는다)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제출 기한이 '당일 퇴근 시'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자료 중에는 엑셀칸 한두 줄만 작성해 줘도 되는 간단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양식만 있고 A4 1~2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전부 새롭게 채워야 하는 부담스러운 자료도 있다. 요즘 같은 국정감사 시즌을 앞두고는 국회의 요구자료도 도착하는데, '000 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부처의 입장은?' 이런 식으로 소관 과의 정책 현황이나 향후 대응 계획을 묻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간혹 최근 5년, 10년 간의 내부 자료를 요청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큰 자료들은 '정책 계획'을 수립하는 보고서인데, 대체로 내가 맡고 있는 분야에 대한 금년, 내년도 정책 추진 계획을 달라거나 아니면 여태까지 없었던 '참신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새롭게 발굴해 낼 것을 요구하곤 한다. 이것이 왜 부담스럽냐면, 내용을 채우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기획'해야 하다 보니 보고 경로가 굉장히 복잡다단해져서다.
이미 시행한 정책의 내용이나 예산 규모 등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자료를 제출할 때에는 '제출한다는 사실'만 상부에 보고할 뿐이지 그 내용에 대한 보고는 필요가 없다. 상급자 입장에서도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자료가 제출되었다는 점만 인지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을 기획하는 경우에는 소위 '사무관의 뇌피셜 자료(흔히 뇌내망상으로 치부되는)'에 대한 상급자들의 의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공무원들은 새로운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데, 단어 하나, 구절 하나 잘못 넣어서 수백억 원 규모의 신규 사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거나, 기존 사업을 감액/폐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내용을 넣은 보고서는 그래서 완성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거쳐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니 쓰기 전부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맘대로 작성한 자료를 수정 없이 제출할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수많은 보고라인에 위치한 사람 모두가 나와 뜻이 같을 순 없는 법. 대차게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할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인정할만한 기똥찬 아이디어면 되지 않냐고?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너무 주목받아버리면 만병통치약인양 이곳저곳 중장기 계획과 국정과제에 마구 포함되어 제출해야 하는 자료만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정작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뭐 이러나저러나, 상급자들에게 보고하고, 피드백에 따라 수정하고, 또 그 위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또 너무 힘 빼고 끄적였다가는 수차례 빨간펜 선생님을 당하고(?) 야밤까지 야근하기 십상이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료 제출기한은 대개 금일 퇴근 시로 동일하다. 어쩌다 다음날 오전까지 달라는 너그러운 요청이라도 들어오면 무척 마음이 편안해진다. 국민의 삶에, 특정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을 당장 몇 시간 내에 기획해 내라는 게 말이 되냐고?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대체 왜 이렇게 기한이 짧은 것일까? 이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중앙부처의 의사결정라인은 뱀처럼 길다. 대기업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글쎄. 우리보다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기업이 있다면 아마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일개 사무관이 작성하는 보고서는 짧게는 담당 국장님까지, 길게는 대통령까지 보고가 이루어진다. 정부의 보고라인은 상상을 초월하게 긴데 대충 아래와 같다.
사무관 → 과장 → 국장 → 실장 → 차관 → 장관 → 대통령실(비서관→수석→정책/비서실장→대통령)
보통 실장급(1급 공무원) 보고까지는 사무관이 할 수 있지만, 차관급 보고는 과장이, 장관 보고는 국장이 한다. 이후 대통령실로 넘어가면 국장이 비서관실(비서관은 보통 실국장급이다)까지는 보고할 수 있으나 수석실(차관급) 이상으로 넘어가면 대체로 해당 부처의 장차관이 직접 소통한다. 의전서열 순위가 장관보다 높은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면 장관이 직접 소통한다.
보고라인이 이렇게 길고 복잡하지만, 각 단계에서 필요한 보고서는 모두 담당 사무관이 작성한다. 당연히 사무관→과장 보고할 때의 보고서와, 국장→장관 보고 시의 보고서는 분량이나 디테일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보통 상부로 올라갈수록 보고받는 사람의 이해도에 맞추어 '쉽고 + 짧게' 서술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특히 부처의 소관분야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계획이나, 정권 초 국정과제를 수립하는 경우에는 해당 부처 기조실(기획조정실)이 취합하여 자료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더더욱 보고라인이 복잡해진다.
아무튼 이런 복잡한 루트는 실무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비슷한 자료를 작성하게 만드는데, 진짜 문제는 윗선에서 아래로 추가 지시가 내려오거나 후속 일정이 잡히는 경우에 발생한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의 대화다.
<10.13.월요일 15시, 대통령실>
A : <K-00산업 울트라하이퍼초격차 전략>의 기본 구조는 이 정도로 수립해 보았습니다.
B : 우선 얼개는 알겠는데요. 내용이 다소 빈약한데, 언론과 업계에서 주목할만한 참신한 전략을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요?
A : 네, 말씀하신 부분 보완해 오겠습니다.
B : 다음 주 화요일에 V 보고드릴 예정이니 이번 주 금요일 오후 2시에 한번 더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상 정부에서는 대통령을 V라고 지칭한다)
대통령실에서 위와 같이 이번 주 금요일 오후 2시 후속보고를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 기한을 역산해 보자. 금요일 오후에 대통령실에 후속보고를 하려면 목요일까지는 장관 보고를 마쳐야 한다. 장관 보고를 목요일 밤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늦어도 목요일 오후 5시에는 보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장관실에서 연락이 온다. 목요일에는 장관님이 지방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있어 대면 보고는 수요일 오후에나 가능하다고.(장관은 하루에도 3~4건의 외부 일정으로 바쁘기 때문에 대면 보고가 어려운 날이 더 많다. 그렇다고 장관보고를 PDF 파일 하나 보내서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되면 수요일 오전까지는 보고서의 최종본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선다. 문제는 이 최종본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보고라인이 지난하다는 사실이다. 통상 각 과의 담당 사무관들이 작성한 자료를 각 국에서 취합하여 기조실에 제출하면 기조실에서 각 국의 자료를 하나의 보고서로 완성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기조실 담당 사무관 입장에서도 취합하여 정리하고 기조실 내부 과장→국장→실장에게 보고할 시간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나처럼 일개 과에 속한 사무관이 자료를 작성해야 하는 기한은 '화요일 오후 4시', 기조실에서 자비를 베풀어 기한에 여유를 주더라도 '화요일 퇴근 시'가 된다. 각 데드라인을 괄호 안에 삽입해 보았다.
과별 자료 작성 및 과장 보고(~화요일 오후 4시) → 국별 자료 취합 후 국장 보고(화요일 오후 4시) → 기조실 자료 제출(화요일 오후 6시) → 기조실 자료 취합 작성 후 기조실 과장, 국장, 기조실장 보고(화요일 오후6시~수요일 오전) → 최종본 완성(수요일 오전) → 장관 보고(수요일 오후) → 대통령실 보고(금요일 오후)
보고라인이 길어 데드라인이 짧아지는 문제만으로도 이미 힘들지만, 공무원 조직에는 보고의 난도를 높이는 고질적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보고 라인을 타고 올라갈수록 점점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이 보고를 받는다는 점이다. 정부과 소관하는 영역이 너무 넓기 때문에, 아니지. 정확히는 모든 영역을 다 소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든 전 분야에 전문가일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종사했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봄이 맞다. 대의민주제 하에서 선거를 거쳐 국민을 대표하는 자를 뽑는 구조상 어쩔 수가 없다. 사실문제는 대통령이 아니다. 일선 부처, 그것도 일개 과에서 작성한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 아랫단을 살펴야 한다.
나랏일을 혼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대통령에게는 선거를 통해 얻은 민주적 정당성에 근거하여 자신을 도울 사람을 뽑을 권한을 부여했다. 이렇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공무원들은 '정무직'이나 '별정직'에 해당하는데 (사전상 의미로는 선거에 의한 선출직도 정무직에 포함되지만 설명충이 될 우려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보통 여기서 보고의 난도가 급상승한다.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 중에는 행정실무 경험이 없는 외부인이 많은데, 본인이 행정 경험이 없다 보니 자료 작성과 내부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 전혀 감이 없다. 오늘 만들어달라고 하면 자료가 내일 뚝딱 나오는 줄 안다. 알지도 못하면서 '공무원들은 무능하고 느리다'라고 욕한다. 이렇다 보니 실무자들은 야근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퇴근 시'까지로 데드라인 안내가 오면, "퇴근 안 하면 데드라인 길어지겠네"라며 체념하고 밤늦게까지 일하기 일쑤다.
심지어 보고받는 사람이 문외한이다 보니, 지시가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좀 쌈빡한 거 없나?", "참신한 거?". 때론 분야에 대한 기본적 이해만 있어도 제안하지 않을 수준의 의견을 언급하기도 한다. "나는 그거 좋아 보이던데~ 그건 어때?"라며.
이 같은 추상적이거나 기본적 이해가 결여된 업무지시는 보고서의 작성 시간과 분량을 증가시킨다. 보고서 본문 뒤에 보고받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여러 페이지의 참고자료를 덧붙여야 하는 관계로 시간이 배로 걸린다. 안 되는 건 왜 안 되는지 쉽게(그러나 짧게) 써야 한다. 게다가 공무원의 말은 도통 믿지 못하는 병들이 있어서, 어디 자문이라도 거쳐 전문가의 의견을 덧붙여줘야 한다. 이렇게 쓰다 보면 보고서에 해당 산업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게 되는데 이 경우 더 쉽게 써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기 일쑤다. '더 쉽고 간결하게 써봐'. 참나.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정책들이 흔히 '장기간의 검토'를 거쳐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금과 같은 의사결정 구조에서 정책이란, 그럴싸한 소리를 내뱉은 뒤 그 말이 현실이 되도록 내용을 채워감에 가깝다. 오늘 내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는데, 어찌 이미 완성된 정책을 말할 수 있을까? 우선은 기세 좋게 호언장담할 뿐이다. 이후 호언장담이 허언이 되어선 곤란하기 때문에 극도의 부담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야근하는 것이다.
어차피 정부 조직 규모를 줄일 순 없겠고, 지금과 같은 긴 보고라인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문외한이 상급자가 되는 게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이들에게 정책/보고서의 사이즈별로 기획하거나 수정하는 데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알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행사 참석 적절성 판단'과 같은 간단한 건이라면 하루, '00 산업 진흥계획'과 같은 복잡한 내용이라면 3개월, 이런 식으로 말이다. 본인이 지시한 내용이 실무선에 닿은 뒤 메아리쳐 되돌아오기까지 최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아야 지금과 같은 졸속적인 정책 수립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약 6년 전,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1~3 지망 부처에서 면접을 보던 당시, 2 지망 부처의 면접관이 내게 던진 질문이 생각난다.
"신속, 정확 중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가?"
"정확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공익을 위해서는 올바른 판단이 중요하고, 올바름이란 정확한 판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정과제도 번갯불에 콩 볶듯 세우고, 새로운 정책 발굴도 하루 만에 끝내고. 정책이란 본디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백년지대계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던가. 나는 오늘도 일용직처럼, 아침에 주어진 일을 그날 밤까지 신속히 끝내기만을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