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라, 그러면 열린다
옛날이야기를 하는걸 다들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가끔 의기소침해지고 왠지 용기가 없어지는 때라든지 뭔가 매너리즘에 빠져 초심이 필요할 땐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싶어했고 이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그래서 이 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되짚어보는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내가 브런치스토리에 자기소개서를 써서 보내고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는 스스로를 성공한 덕후라고 말하며 어릴 적 꿈꿨던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대견스러워해왔다. 돌아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스포츠계에서 일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루트를 통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정보도 없이 그냥 마냥 하고 싶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방송국 문을, 그것도 우연히 두드렸던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스포츠기자가 되고 싶어 당시에는 전국에 몇개 되지 않는 신문방송학과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고 그 목표를 이뤘다. 하지만 대학진학에 모든 걸 쏟아부었던 나는 그 이후 동력을 잃었는지 아니면 여러 상황상 졸업을 무사히 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던건지 대학교 4학년이 될 즈음에는 취업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처럼 글쓰고 말하는 능력은 있었는지 조그만 사내방송 제작회사에서 글을 쓰며 살았고 그렇게 이어져 방송국 책자 제작에 참여하게 됐고, 그것이 인연이 돼서 라디오 리포터 공채 시험을 볼 수 있었다. 턱걸이로 겨우 합격한 나는 그제서야 나의 발음과 발성이 방송하기에 얼마나 부족하며 나의 멘탈이 얼마나 유리멘탈인지를 알았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열심히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나만의 소리와 나만의 말하기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주 즐겁게 방송국에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갈망은 더 짙어갔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아쉬움을 경기 직관으로 달래는 것 뿐, 내겐 기회가 없었다.
어느날, 나는 예정된 방송을 빠져야했다. 그 이유는 경기 직관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 아마도 대표팀 축구경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피디하게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냈는데, 그때 피디가 "스포츠 좋아하냐, 자주 경기를 보러 가냐" 등등 꽤나 관심을 보였고, 나는 지나가듯 원래 스포츠 팬이고 스포츠기자가 꿈이었다고 말했다. 정말 1분도 안되는 대화였다. 그런데 그 대화는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스포츠리포터는 적어도 라디오에서는 3D 업무로 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구경기만 예를 들어도 당시 가장 가까운 곳이 잠실구장이었고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취재를 가서 사전 인터뷰 때 인터뷰를 담고 3시간이 넘는 경기를 지켜본 후 5분 남짓의 인터뷰를 녹음한다. 경기를 즐기지 않으면 오고 가는 시간까지 7, 8시간의 시간이 필요한 일, 어쩌면 지루함의 연속이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특히 여성들이 많은 라디오리포터들 사이에서 스포츠는 가장 선호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했다. 당연히 피디들은 스포츠리포터를 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스포츠 방송을 해보고 싶다는 친구가 하나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후 나와 그 피디는 서로 이 대화를 했는지도 잊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그 대화가 오간 수년 후 나는 출산을 하고 방송을 계속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스포츠방송을 해보자는 연락을 받게 됐다. 수년전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피디가 스포츠리포터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대화를 하던 20대가 아닌 30대 아기엄마였고, 그 아기는 막 백일이 지난 상황이었다.
내가 결심을 굳힌 건 두사람의 이야기때문이었다. 당시 내게 연락했던 피디는 "이것저것 생각하면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였고, 가족 중 한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스포츠를 가장 좋아하고 잘 아는게 너다"라고 응원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을 한켠에 접어두고 용기를 냈고 그 시작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꿈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꾸 말하고 알려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 귀에 들어가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만 나 스스로 나의 꿈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이 언젠가는 꿈꿨던 나로 살아볼 기회를 줄 수 있게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꿈을 이야기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덕분인지 리포터를 하고 작가가 됐고 때론 스포츠칼럼니스트로 스포츠전문방송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새로운 꿈과 목표를 떠들고 다니는 중이다. 그래야 나와의 약속이자 타인과의 약속이 되기 때문에.
꿈이 있다면 말하고 또 말하라, 그렇게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분명히 기회는 온다. 단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가 돼 있어야한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