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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ara May 19. 2022

취미핥기 #2-자전거

두 바퀴 위 아찔한 자유로움

 내 최초의 기억은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시작한다. 짙은 빨간색 세발자전거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던 어린 나. 사진을 찍던 순간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자전거에 올라앉아 열심히 페달을 구르며 즐거워하던 느낌은 기억한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세 살 때부터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뒤에 친구들도 자주 태워 줬다고. 어렸을 때의 경험과 기억은 한 사람의 많은 부분을 이룬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좋아했던 사람은 커서도 강아지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좋아했던 사람은 커서도 자전거를 좋아한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숙한 곳에 기억들이 깔려 남은 삶을 만들어 다.

 

인적이 없는 새벽은 속도를 내기 좋은 시간이다. 한강을 향해 텅 빈 도로를 달린다. 헬멧과 귓바퀴를 타고 도는 바람소리가 거세다. 맞바람이 불어도 페달을 늦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멈추고 싶은 순간을 몇 번 넘기고 나면 어느덧 머릿속에 흰 섬광이 터진다. 깊게 내보낸 숨이 나를 쉰다. 원을 그리며 구르는 다리가 아득해진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 보면 많은 것들이 뒤로 지나간다. 뒤로 보내기 위해, 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마음으로 나는 달린다. 빨간 세발자전거를 타던 아기는 그렇게 여전히 자전거와 함께 하고 있다.


글쎄, 폭주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달리고 싶은 순간이 오면 자전거와 함께할 뿐이다. 어차피 내 자전거는 최고속력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전거가 아니다. 세 살 이후로 지금까지 자전거를 좋아해 온 만큼 다양한 자전거를 탔다. 세발, 네발자전거(삐요오옹 삐요오옹 하던 전자 벨이 달린)를 지나 일반적인 모습의 유사 산악자전거, 하이브리드, 픽시, 몇 대의 로드를 지나 지금의 자전거까지. 부품 변경과 조정이 비교적 쉬운 만큼 자전거에는 타는 사람의 성향이 깃들기 마련인데, 지금 내 자전거는 이런 모습이다.

함께 한 지 4년이 되었다


보다시피 경주용 자전거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공기역학도 무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자전거 본연의 즐거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면과 수평을 이루는 튼튼한 크로몰리 프레임, 35c의 안정적인 고압 타이어, 디스크 브레이크, 여유를 담을 수 있는 핸들 백,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클래식한 부품들, 그것들이 이루는 자전거의 원형에 가까운 실루엣.

내 자전거는 세미(semi)의 연속이다. 세미 클래식이자 세미 투어링, 세미 그래블 바이크이다. 세미라는 게 이도 저도 아닌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적당히 갖추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웬만한 길은 모두 함께 할 수 있다. 아주 값비싼 자전거도 아니어서, 망가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 편하게 페달을 밟으면 된다. 그런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고 속삭여 오는 것 같다. 홀가분함과 견고함, 오랫동안 변치 않는 가치를 좋아하는 내게는 좋은 친구다.

밤의 한강은 달리기 쾌적하다
모든 곳이 길이 된다

자전거 본연의 즐거움이란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곳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와 함께 집을 나서면 평범한 일상도 작은 여행이 된다. 돌 위에서 한가롭게 볕을 쬐는 거북이를 발견하고, 풀밭과 흙길을 가로질러 내달리고, 길 가운데를 지나는 아기 달팽이를 구조하고, 거센 맞바람을 만나 잠시 쉬어가고, 자전거를 옆에 세워둔 채 한강을 바라보며 물멍을 하다 집에 온다. 그렇게 사람과 자동차 사이의 속도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세상을 만난다. 속도를 내 달리는 것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오직 나의 힘으로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자유로움. 자전거가 전해 주는 그 느낌이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 주고 있다. 지금의 나는 자전거 위에서 더 멀리,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빨리 달릴수록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는 선명해진다. 잃어버린 게 뭔지도 모른 채, 순수하게 즐거웠던 마음을 향해서 페달을 밟고 또 밟는다. 그러다 보면 먼발치에 어린 나를 태워 주던 빨간 세발자전거가 보이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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