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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ara Jun 05. 2022

일상적 여행기-제주도

한정된 것들의 아름다움

 가로등 없는 해변가는 어두웠다. 어두워서 사람 없는 해변가를 온 힘으로 달렸다. 파도가 훑고 빠진 모래는 탄력이 있었다. 바닷물을 촉촉하게 머금은 모래가 달빛을 은은히 튕겨냈다. 맨발이 젖은 모래에 닿을 때면 경쾌한 타격음이 났다. 살아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 주는 소리였다. 그 느낌이 좋아 모래사장을 온통 발자국으로 채웠다. 바다의 이 편에서 저 편으로 몇 번이고 달렸다.

그러고는 친구들 곁에 주저앉아 파도에 노래를 묻었다.

바닷가에서 듣는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울림이 더 크다

 


제주도를 다녀왔다. 나는 여행을 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편이다. 그 여행을 대표할 수 있는 유튜브 썸네일 같은 장면 하나를 정해서 머릿속 서랍에 넣어 둔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 그 여행' 하고 기억이 와르르 쏟아질 만큼 인상 깊은 장면이어야 한다. 이번 제주도 여행의 썸네일은 바닷가 달리기. 올해 들어 제일 상쾌한 순간이었다. 바닷가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 해보시길.



여행을, 고대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여행의 과정에 동반되는 번잡한 것들을 싫어해서, 아니면 단순히 집이 좋아서 여행을 꺼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일탈, 어려울 것 없는 단어다. 정형화된 하루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 그것이 일탈이다. 일상의 한 요소만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일탈은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완벽한 일탈이다. 하루가 펼쳐지는 시간표와 무대를 송두리째 바꿔 버리니 말이다.

달리 말하면 여행은 일상에 작은 구멍을 내고 거기에 모든 것을 집어넣는 과정이다. 365일에 사흘 정도 크기의 구멍을 내고, 거기에 나머지 362일을 이루는 요소들을 몽땅 집어넣어야 한다. 그 요소들이란 일상의 나를 이루는 모든 걱정거리와 일거리와 계획을 아우른다. 그래서 때론 여행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다. 그 작은 구멍에 362일 치의 비대하고 자잘한 걱정을 욱여넣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해 온 시간 속에서조차 돌아갈 일을 생각하는 스스로가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행은 완전한 탈출이 아니다. 여행은 체포가 예정돼 있는 탈옥 같은 거다. 결국엔 파도에 잔잔히 부서지는 달빛 대신,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좀비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들의 새빨간 후미등을 멍하니 바라보게 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돌아갈 현실로부터 여행지보다도 멀리멀리 떠날 수 있는 힘이 여행에 있어서의 행복을 결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여행의 순간보다도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을 더욱 즐겁게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지 모른다. 떠난 뒤에는 돌아올 일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소풍 전날이 소풍 당일보다도 설레는 느낌으로.

동시에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지 않는 벚꽃과 끝나지 않는 노래가 아름다울 리 없다. 청춘이 예찬되듯, 죽음이 삶을 빛내듯 한정됨은 그 자체로 여행의 미덕이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한 것들이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깨어 있어야만 한다. 사진은 부속품일 뿐이다. 본질은 그 순간을 영위하던 나로 남는다. 짧은 여행 속 지금을 포착하기 위해 모든 감각에 충실할 때에야 우리는 현실의 짐들로부터 한 발짝 멀어진다. 여행의 한정됨은 이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불행과 행복의 가능성을 동시에 건넨다.

그러나 사실 모든 순간이 그와 같다는 것을. 삶은 긴 여행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여행지에서의 일순간이 한정되어 특별하듯 우리의 삶 매 순간도 그렇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지금의 나는 사라졌다. 2022년 6월 5일 오전 12시 52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일상이라고 불리는 순간들은 여행과 정확히 같은 질량을 지니고 있다. 여행은 색다른 요소들을 통해 한정된 시간 속 우리의 삶을 부각할 뿐이다. 여행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일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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