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pybara Jan 16. 2023

취미핥기 #3-만년필

작고 애틋한 불편함

혹시 당신, "그런 쓸데없는 걸 왜 사?"나 "너도 참 사서 고생이다" 같은 말을 자주 듣지 않는가? 그게 느림의 미학이건 반골기질이 됐건, 당신만의 이유로 비효율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둘 중 하나, 만년필을 쓰고 있거나 만년필을 쓰게 될 사람이다.


우선 이 시대착오적인 필기구의 특성에 대해 몇 마디 적어야겠다.

서예용 붓 정도를 제외한다면, 만년필은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필기구 중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간다.

만년필을 쓰려면 손에 쥐는 각도와 글씨 쓰는 세기를 신경 써야 하고 주기적으로 펜촉을 비롯한 부품들을 분해세척해야 한다. 잉크를 직접 주입하는 일은 기본 중 기본이다. 가지고 다닐 때 많이 흔들리면 잉크가 뚜껑 안에 튀고, 습도 높은 날에는 종이 위에 글씨가 묘하게 번진다. 쓰다가 잘못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펜촉이 박살 나 버린다. 굳이 나열할 것도 없는 게, 볼펜이 발명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만년필의 불편함은 온전히 입증된다. 그런데도 만년필은 아직까지도 꾸역꾸역 생산되고 있다. 꽤나 열성적인 팬들을 거느리고.

도대체 이 불편한 걸 왜 쓰는 걸까 싶을 수도 있지만, 만년필을 쓰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불편함에 있다. 불편함이야말로 만년필을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유일의 필기구로 만들어 주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만년필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  오랜 기간 착용한 가죽 부츠나 가죽 재킷, 생지 데님이 착용자의 몸에 딱 맞게 길들여지듯 만년필도 소유자의 필기 습관을 머금는다. 너무 꼿꼿이 세워 쓰거나 지나치게 눕혀 쓰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갈라진 양쪽 펜촉(닙이라 부른다)이 고루 종이에 닿기만 한다면 만년필은 점차 당신이 글씨를 쓰는 방식대로 '길들여진다'. 반영구적인 사용을 보장해 주는 닙 끝부분의 금속 코팅이 종이와의 마찰로 인해 아주 천천히 마모되며, 당신에게 맞춰져 가는 것이다. 그처럼 오랜 시간 소유된 만년필은 다른 사람이 쓸 때에는 이질감을 느낄 만큼 한 사람만을 위한 충직한 물건이 된다. 이처럼 나를 닮은 물건이 만들어진다는 사실, 가슴 설레지 않는가?


동시에 만년필은 잉크의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만년필을 통해서는 존재조차 몰랐던 수많은 색깔의 잉크로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잉크의 세계에 같은 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파란색이라고 통칭되는 색깔들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어서 미드나잇 블루, 터콰이즈 블루, 스카이 블루 등 온갖 종류의 파란색을 사용할 수 있다. 많아 봤자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네 가지 색만이 허용되었던 지면 위에 무지갯빛 그라데이션이 펼쳐진다. 팬톤 컬러표처럼 다양한 색의 잉크 중 자신의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잉크를 찾아내고 사용하는 일은, 만년필을 사용하는 쏠쏠한 재미 중 하나다. 영어로 'Fountain pen'인 만년필. 그 이름처럼 샘에서 물이 퐁퐁 솟아 나오듯, 색색의 잉크를 흘리는 것은 만년필만의 매력이다. 


나는 두꺼운 필통 네 개를 빵빵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샤프와 볼펜을 모아 왔지만, 이제 와선 연필 몇 자루와 만년필 두 자루만을 쓴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던가, 돌고 돌아 필기구의 원형에 정착한 것이다.


몽블랑에 대한 로망은 크지 않지만, 클래식한 매력은 확실하다.


그중 하나는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튁 P145. 몽블랑의 소형기와 중형기 사이에 걸쳐 있는 모델이다. 아버지가 언젠가 선물 받으신 걸 가져와서 쓰고 있다. 내 돈 주고는 사지 않았을 가격인 만큼, 신경 쓰며 사용하게 돼서 잘 쓰지 않는다. 어디 흠집이라도 날까 신경 쓰다 보니 내가 펜을 쓰는 건지, 펜이 나를 쓰는 건지 모르겠더라. 더군다나 남들이 좋다고는 하나, 소재나 크기가 내 취향은 아니었다.

묵직한 황동 바디와 거대한 닙, 병장기를 연상케 한다. 요즘은 이것만 쓴다.

그래서 들인 카웨코의 수프라. 황동 바디 특유의 묵직함과 앤틱함, 커다란 닙에 마음을 뺏겼다. 펜클립도 없는 늘씬하고 원시적인 디자인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몽블랑이 있는데 굳이 새로 들여야 하나 고민했지만 몽블랑은 내가 고른 만년필은 아니었다. 사고 나서 확실히 느낀 점은 남들이 아무리 좋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말인데, 모든 가치는 자신에게서 출발해야 하나 보다. 자신에 의해 형성되고 체화된 것만이 진정 가치라 불릴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 마디 이 다 공염불이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가치는 가치가 아닌 것이다. 물건이고 인생이고,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가치에 따라서 '사는' 게 행복한 길 아닐까.


그게 무엇이든, 당신도 만년필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 행복하다.

작가의 이전글 불편함을 사랑하는 우리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